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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미륵사지 (益山彌勒寺址)
익산 기양리에 있는 백제 때의 절터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 무왕 때 왕이 왕비와 사자사(師子寺)에 가던 도중 용화산 밑의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는데, 왕비의 부탁에 따라 이 연못을 메우고 3곳에 탑, 금당, 회랑을 세웠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미륵사는 백제 무왕 때 지어져 조선시대에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불교 총서(朝鮮佛敎 叢書)》에 실린 고려 초 혜거국사비문에 의하면 후백제 견훤 때(922)에 미륵사의 개탑(改塔)의 기사가 실려 있어 이때 미륵사의 탑이 복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 그후 조선시대《동국여지승람》과 영조 때 강후진(康侯晋)《와유록(臥遊錄)》에서 기록을 볼 수 있는데 전자에서는
"석탑이 극대하여 그 높이가 수십척으로 동방석탑 중 제일이다."고 하였고
후자에서는 "밭둑 사이에 7층석탑이 있는데 대단히 높고 크며…
세상에서 이르기를 동방석탑에서 제일이란 말이 거짓이 아니다. 백년 전 벼락으로 인하여 그 반이 허물어졌고,
… 밭둑 사이에 초석과 석조가 널리 있는데, 그 반이 노출되거나 전체가 노출되었고… 종각의 초석으로 보이는 것이 완연히 남아 있다…" 라고 하여 이때 이미 사찰이 폐허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 고증을 통해 만들어진 재현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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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부터 1995년까지 국립문화재연구소 주도하에 체계적인 발굴조사가 건물의 기본적인 구조를 확인하였다. 다만 미륵사지 석탑은 우리나라의 현존 석탑중 최대 최고 규모이긴 하지만 아시아 최대라고는 볼 수 없다. 석탑터 주변에서 출토된 부재로 동원(東院) 석탑의 복원안을 연구한 결과 9층임이 밝혀져 1993년 동탑이 복원된 바 있고 목탑 역시 복원안이 마련되어 1997년 개관된 전시관에 그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다. 가람의 배치는 동·서로 석탑이 있고 중간에 목탑이 있으며 탑 뒤에는 부처를 모시는 금당이 각각 자리한다. 이것이 복도(회랑)로 구분되어 매우 특이한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중심사역외에 서편에는 통일신라 및 고려시대 건물터가 있고, 북편에는 조선시대 가람터가 확인됨으로써 백제 이후 계속된 미륵사의 모습과 하한연대를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사역(寺域) 남측에는 거대한 동·서 연못지가 있고 그 규모와 조성방법 등이 발굴조사를 통해확인되었다.
각 원의 금당(金堂)은 모두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중원의 금당이 동·서 금당보다 규모면에서 조금 크다. 특히 금당은 바닥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높이 1m 정도의 주춧돌을 마름모꼴로 놓았으며,

금당의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이고 바닥에는 빈 공간이 있는데, 이것은 바닥마루의 습기에 대비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조선시대 건물터에서 온돌시설이 발견되어 온돌의 발전과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출토된 유물로는 기와·토기·금속·목재 등 다양하며 글자를 새긴 기와도 많이 발견되었다. 서쪽 금당 앞의 석탑은 국보 제11호로 지정되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목조건축의 기법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전시관에는 미륵사의 복원된 모형이 있다.
절터에서 출토된 '만력십오년(萬曆十五年)(1587)'과 '만력십칠년(萬曆十七年)(1589)' 명 기와를 통해 이 시기를 전후하여 절이 폐사(廢寺)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미륵사는 신라의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막고자 지은 호국사찰로서 백제가 망할 때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 여겨지는 역사적 가치가 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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