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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님 너무감사 제가 숙재..
정말 알고 싶었던 내용..
좋은 정보 잘 보고 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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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5/11/26
 


(히스토리어님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교육목적으로만 사용하겠습니다.)



황진이의 시와 생애(1)
 

-= IMAGE 1 =-

황진의 지음

------------소세양 판서를 보내며--

月下梧桐盡(월하오동진)
霜中野菊黃(설중야국황)
樓高天一尺(누고천일척)
人醉酒千觴(인취주천상)
流水和琴冷(유수화금랭)
梅花入笛香(매화입적향)
明朝相別後(명조상별후)
情與碧波長(정여벽파장) .

소세양이 소싯적에 이르기를, “여색에 미혹되면 남자가 아니다”라고 했다. 황진이의 재주와 얼굴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는 친구들에게 약조하기를 “내가 황진이와 한 달을 지낸다 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자신이 있네. 하루라도 더 묵는다면 사람이 아니네”라고 호언장담을 하였다.
그러나 막상 송도로 가서 황진이를 만나보니 과연 뛰어난 사람이었다. 30일을 살고 어쩔 수 없이 떠나려 하니, 황진이가 누(樓)에 올라 시를 읊었다. 이 시를 듣고 소세양은 결국 탄식을 하면서 “나는 사람이 아니다”라며 며칠을 더 머물렀다.
이 때 황진이가 읊은 시가 바로 <봉별소양곡세양(奉別蘇陽谷世讓)>이다.
하지만 이 시로 봐서 황진이도 그에게 마음을 주었던 것 같다.

소세양 蘇世讓 1486∼1562 <성종 17∼명종 17>

조선 전기 문신. 자는 언겸(彦謙), 호는 양곡(陽谷). 본관은 진주(晉州).
1504년(연산군 10) 진사가 되고 1509년(중종 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37년 형조·호조·병조·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을 역임 하였다.
1545년(인종 1) 윤임(尹任) 일파의 탄핵으로 사직하였으나, 명종의 즉위 뒤 재기용되어
좌찬성을 지내다 사직하고 익산(益山)에 은퇴하였다.



청산리 벽계수야… <황진이>

청산리 벽계수(靑山裏 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一到蒼海)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 황진이와 벽계수와의 이야기는 서유영(徐有英,1801~1874)의 <금계필담(錦溪筆談)>에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나온다고 한다.

벽계수는 황진이가 명사가 아니면 만나주질 안아, 고민하다가 친구인 이달에게 물어 만날 방법을 물어본다. 그러자 이달은 황진이를 약속한 장소로 불러 낼 터이니 어떤 유혹과 노래를 하더라도 앞만 보고 가라고 했다. 벽계수는 이달의 말 대로, 황진이가 나와있던 정자각을 그대로 지나쳐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황진이가 "청산리 벽계수야 "라는 시조를 읊었다고 한다. 그 아름다운 목소리가 너무 좋아 벽계수가 뒤돌아보다가 말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황진이가 명사가 아니라 풍유랑이라 라고 말하고 돌아가 버렸다고 한다.


이처럼 고관대작은 물론, 왕실종친까지 농락하였던 황진이는 누구인가?
그녀의 본명은 진 기명은 명월이며 조선 중기 개성(송도)의 명기로 유명세를 떨쳤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또 각종 야사에 나와있는 내용도 제 각기 여서 신빙성이 높지 않다. 중종시대 때의 기녀였다는 설과, 명종 시대 때의 기녀였다는 설이 있는데, 그녀와 관련된 일화가 대부분 중종시대 때인 것으로 보아서 1520년대부터 ~ 1560년대쯤 살았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녀의 어머니 진현금은 개성의 병부교 아래서 빨래를 하다가 황진이의 아버지 황진사를 만나서 그의 첩이 됐다고 한다. 그녀는 어려서 부터 총명하였을 뿐더러 용모가 아름다워, 이웃마을에까지 알려졌을 정도이고 서화와 가야금등에도 능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녀를 흠모하던 이웃의 한 청년이, 그녀와의 결합을 원하였으나 부모의 반대로 결합이 성사되지 않자 황진이를 흠모사던 그 남자는 상사병에 걸려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황진이가 살던 집 근처로 가자, 그의 관을 싫은 수레는 한 발짝도 움직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황진이의 속저고리를 덮어주었더니 움직여서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이를 계기로 그녀는 자신을 원하는 어떠한 남자도, 자신때문에 상처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기녀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을 담은 계원필담은, 다소 설득력이 떨어진다.
우선 당시 정서상, 비록 후첩의 딸이더라도 스스로 기녀가 되었다는 것은 이해 할 수 없다. 정말 자신을 흠모하다가 병을 얻어 죽은 이가 있다면, 그 남자를 위해 평생 수절하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아니면 차라리 출가하여 비구가 되어, 평생을 기도하며 승려로 살았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어머니는 맹인이었고, 절에서 더부살이 하다가 먹고 살 길이 막막하여, 딸을 기적에 올렸다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오히려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다.

아무튼, 그녀가 송도 교방에 기적을 올리면서, 시서화에 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유명인사가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개성 유수 송공은 이 소문을 듣고 황진이를 대부인 연회석에 초대 하였는데 그때 여러 사람들이 황진이의 빼어난 모습과 아름다운 춤사위를 보고 반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황진이는 유명인사가 되기 시작하였고, 고관대작들 사이에선 그녀와 하루밤을 보내는 것이 큰 이야기 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고관대작이라 하더라도 그녀는 아무나 받아주는 것이 아니었다. 왕실 종친 벽계수와의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신의 진심을 움직이지 못한 사내에게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몸을 허락하지 않았다.

또 당시 기녀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결말이란,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의 후첩이 되어 한재산 톡톡히 물려 받는 것이 전부였다. 황진이는 충분히 그럴만한 수준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여성으로서의 자존심을 지켰고, 이것이 오늘날에도 그녀를 재평가 하는 이유일 것이다.
황진이의 시와 생애 -2-

-= IMAGE 1 =-

황진이 특유의 시적 음유와 정서가 가장 잘 묻어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잣나무 배 <황진이>


저 강 한가운데 떠 있는 조그만 잣나무 배
몇 해나 이 물가에 한가로이 매였던고
뒷사람이 누가 먼저 건넜느냐 묻는다면
문무를 모두 갖춘 만호후라 하리



세월이 흐른 뒤, 황진이가 자신의 첫사랑을 생각하며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황진이의 첫 사랑에 대해, 상사병으로 죽어간 유년시절의 청년이었다는 설과, 또 김경원이라는 사내였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아래시에서 보듯 김경원은 한량, 즉 글 공부만 하는 선비였을 뿐 예조판서직에 나갔다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또 김경원과 만난시기는, 소세양이나 벽계수등의 고위급 인사들을 연달아 농락하던 시기여서, 첫사랑은 아닌 듯 보여진다.

김경원과 헤어지며 <황진이>


삼세의 굳은 인연 좋은 짝이니
이 중에서 생사는 두 마음만 알리로다
양주의 꽃다운 언약 내 아니 저버렸는데
도리어 그대가 두목(杜牧)처럼 한량이라 두려울 뿐

別金慶元 (별김경원)
三世金緣成燕尾 (삼세금연성연미)
此中生死兩心知 (차중생사양심지)
楊州芳約吾無負 (양주방약오무부)
恐子還如杜牧之 (공자환여두목지)


황진이에 얽힌 일화종 선전관 이사종과의 이야기는 특히 유명하다.
이사종이 사신으로 송도를 지나다가 천사원 냇가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래가 아주 출중하였다고 한다. 그 노래에 반한 황진이가 찾아가 서로 마음속에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는 이사종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여러 밤을 함께 지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마음에 들었는지 이사종에게 "내 마땅히 당신과 6년을 살아야 겠소"라고 말하고는 이사종에 집에 3년 동안 먹고 살 돈을 가져가서 살고 3년 후 이사종을 자신의 집으로 대려와 살았으며 6년이 지난 후에는 깨끗이 헤어졌다고 한다. 아마도 우리나라 최초의 계약 커플인 듯싶다.

하지만 허식으로 가득 찬 양반의 체면을 꺾는 것에도 흥미를 잃었던지. 이생이라는 남자와 함께 금강산을 몇 달 동안이나 유람하였다고 한다. 여행비용이 다 떨어질 때는 곳곳의 절을 돌아다니며 허드레 일을 하며 음식을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행이 끝나자 곧바로 헤어졌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면벽수련 30년이라고 유명한 지족선사를 파계시켰다고 한다. 30년 동안 벽만 보며 도를 닦은 승에게, 황진이의 뛰어난 용모나 재기는 아마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朴淵瀑布 (박연폭포) <황진이>


한 줄기 긴 물줄기가 바위에서 뿜어나와
폭포수 백 길 넘어 물소리 우렁차다
나는 듯 거꾸로 솟아 은하수 같고
성난 폭포 가로 드리우니 흰 무지개 완연하다
어지러운 물방울이 골짜기에 가득하니
구슬 방아에 부서진 옥 허공에 치솟는다
나그네여, 여산을 말하지 말라
천마산야말로 해동에서 으뜸인 것을.

황진이는 많은 남자와 관계를 맺었지만, 말년에 그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화담 서경덕이다. 서경덕은 조선 중종때 활동하였던 학자이다. 1519년(중종 14) 조광조(趙光祖)에 의해 현량과(賢良科)에 응시하도록 추천받았으나 사양하고 학문연구에만 전력하였다. 1531년 어머니의 요청으로 생원시에 응시하여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개성(開城) 화담가에서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이기론(理氣論)의 본질을 연구하여 우주 본질로서의 이(理)와 기(氣)를 논하고, 이와 기의 상관관계에서 천지만물이 형태화하며, 음양(陰陽)으로 분화한다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체계화했다.
그가 벼슬을 멀리하고 고향에서 은둔하며 오직 학문에만 정진한데에는 개인적인 성격탓도 있겟지만 시대적 배경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당시 중종은 연산군을 패위시키고, 조광조를 등용 일대 개혁 정책을 폈다. 하지만 조광조는 지나치게 도학적인 정치를 강조하였고, 중종도 이런 조광조의 이상주의적 정치성향에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또 이기 일원 철학은 현세치용적인 성격이 강하였기 때문에 조광조의 도학정치와는 다소 맞지가 않는다. 더구나 연산군 시대에 무오(1498년) 갑자(1504)사화가 일어나서, 많은 사림들이 숙청 당하였고 이로인해 정치에 대한 환멸과 운든적인 삶이 성행하였다.
서경덕은 이러한 시대 청빈과 학문정진을 큰 목적으로 삼던 선비들의 우상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그를 꺾는 것은, 모든 양반을 꺾는 것, 최후의 목표인 그에게 여러 가지 방법을 써보고 함께 오랜 시절을 지냈으나 서경덕은 의연할 뿐 아니라, 그녀를 기녀가 아니라 한명의 재인으로 대해 주었다.
황진이는 마침내 승복하였다. "지족선사는 30년 면벽수련에도 내 앞에 무릎을 꿇었는데 서경덕은 함께 오랜 시절을 지냈으나 끝까지 나에게 이르지 않았으니 진정 성인이다."라고 말해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서경덕에게 제자로 받아줄 것을 부탁했다. 그래서 제자가 됐고 황진이는 서경덕 황진이 박연폭포이 세 개를 송도삼절이라고 불렀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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