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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5/11/26
 

경복궁의 설계자 환관 김사행,


 현재 서울시에는 창덕궁을 비롯한 덕수궁, 창경궁등 꾀 많은 건축물들이 보존되어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 정궁은 오직 하나 경복궁밖에 없으며, 나머지 궁궐은 필요에의해서 지어지거나, 임란당시 경복궁이 완전소각되면서 중건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대원군에 의해서 이전의 궁궐보다 10배 이상으로 대규모 중건된 경복궁의 원 설계자는 누구일까? 모두 아는 상식이겠지만 대원군은 경복궁의 중건을 명했을 뿐 설계자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조선을 창업한 이성계역시 궁궐공사를 지시하였을 뿐이며, 또 이 조선의 정궁에 '경복'이란 이름을 지어준 '정도전'역시 작명인일지는 모르지만 이 아름답고 웅장한 건축물은 시공하고 설계한 사람은 아니다.

 사실 정도전은 학자이자 정치가이지, 건축이나 토목공사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는 인물이다. 경복궁의 최초 시공자는 바로 환관출신의 김사행이다.
 물론 원래의 건물들이 완전소각되어 그의 솜씨를 직접 볼 수는 없지만, 경복궁의 주 건물인 근정전을 비롯해, 사정전, 교태전, 강녕전등이 그의 감독아래 하나 둘 완공되었다.

 그런데 우리 역사에서 경복궁을 지은 천재건축가 김사행의 이름은 사라졌고 그 빈자리를 작명자 정도전이 차지했다. 이런 왜곡이 일어난 이유는 다름아닌 그가 환관(宦官)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후일의 태종)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당했기 때문에 오욕의 이름으로 기억되기 시작했다.
환관 김사행

환관 김사행(金師幸)은 그가 원나라 환관으로 있다가 고려 공민왕 때 돌아왔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공민왕의 총애를 받아 내시부사로 승차하였고, 이후 각종 대규모 토목공사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였다.
 
 일예로 공민왕비이자 몽골족 출신인 노국공주가 사망하자, 그녀를 추모하기 위한 대규모 사찰 공사를 단행하였고, 능묘조성작업을 훌륭하게 마무리하여 말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당시 말 한필은 현재로 치면 경호원을 대동한 최고급 자동차를 받는것이나 마찬가지의 파격적인 대우였다.  이같은 대규모 건축공사를 시행한 것으로 봐서  아마도 북경에 있으면서부터 건축에 각별한 조예를 갈고닦았던 것으로 보인다
. 

 하지만 국왕으로부터 총애를 받는 환관은, 그 운명역시 국왕과 함께 하였다.  환관 최만생등이 공민왕을 암살하고 우왕이 즉위하자 김사행은 ‘왕을 부추겨 사치를 조장하고 대규모 공역(工役)을 일으켜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했다’는 죄목으로 익주(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의 관노로 전락했다.
 그나마 다른 환관처럼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지 않은 덕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우왕은 다시 김사행을 불러들였고 창왕, 공양왕을 거치면서도 김사행은 위태로운 가운데 궁궐생활을 이어갔다. 김사행은 신하들과 국정을 논의하며 성리학을 익히는 자리인 경연에 참석하려는 공양왕에게 “한두 번 빠진다고 국정에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며 불교를 믿도록 권유하기도 했다

공양왕 시절 최고 실권자는 이성계였다.
공양왕의 내시부사였던 김사행은 두 사람 사이의 가교역할을 했다. 이 과정에서 이성계는 김사행을 눈여겨보았을 것이다. 조선 개국과 함께 김사행은 고려의 배에서 조선의 배로 옮겨 탔다. 건국 1년을 맞은 태조 2년 7월 27일 이성계는 창업에 공이 있는 신하들에게 교지를 내려 치하했다. 그 중에 김사행이 포함돼 있다.

내시부 판사 김사행은 내가 왕위에 오른 초기에 궐내의 제도가 갖춰지지 못했는데 고려조가 왕성했을 때의 궁중 제도와 의식을 일일이 알아내어 지나친 것은 줄이고 모자란 것은 보태어서 내조(內助)의 다스림을 장식했으니 공을 기록할 만하다.”

고려 말 환관의 폐단을 몸소 겪은 개국공신들은 환관을 모두 궁에서 내쫓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사대부의 집안에도 종이 있는데 궁궐에 국왕이나 중전의 시중을 드는 환관이 없을 수 없었다. 태조의 이 같은 뜻을 받들어 조선 초 내시부의 제도를 정비한 장본인이 바로 김사행이었다.

경복궁을 짖다



한양 천도 및 경복궁 창건을 추진할 때 태조 이성계는 신하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건국 초기에 백성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역사(役事)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정도전도 반대의 선봉에 있었다.
반면 하륜을 비롯한 일부 신하들은 “건국 초야말로 왕권의 위엄을 상징할 대역사를 일으킬 적기”라며 태조를 지지했다. 

조선실록 태종조에 보면 태종 이방원이 태조 시절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고 한다. “태조 때 모든 공역(工役)을 김사행이 맡았다. 온 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김사행이 태조를 권하여 공역을 일으켰다’.
 따러서 환관 김사행은 태조의 뜻을 받을어, 경복궁 건축의 실질적인 설계자이자 공사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경복궁 공사의 공이 인정되어 김사행은  벼슬이 도평의사사사(都評議使司事)에 이르고 가락백(駕洛伯)에 봉해져 항상 가마를 탄 채 궁궐에 드나들었을 정도이다. 조선시대 전 역사상 환관으로서 이 같은 영화를 누린것은 그가 유일하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1398년 후비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는데, 김사행은 당연히 국왕의 뜻을 받들었다. 그것이 곧 환관이 본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되고 말았다.
 후비소생이 왕자로 지명된 것에 반발한 태종 이방원이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간을 축출하고, 여기에 관련된 인물을 모조리 사형시키고 말았다.

   김사행 역시 참수형을 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죄목은 이 사건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죄목은 고려말 우왕시절 그가 익주로 쫓겨날 때와 같았다.
왕을 부추겨 사치를 조장하고 대규모 공역(工役)을 일으켜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했다'는 것이다.
 그의 최대 치적이 그의 사형집행 이유가 되어 버린것이다.


김사행
(金師幸 ?∼1398(?∼태조 7))

고려말 조선초의 환관(宦官). 초명은 광대(廣大). 공민왕의 총애를 받고 판내부사(判內府事)에 이르렀으며 왕명으로 정릉영전(正陵影殿)의 대역사를 일으킨 결과 국가 재력을 소모하고 민생을 괴롭혔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자 선왕 때의 대역사를 일으킨 죄로 가산이 몰수되고 익주(益州)로 쫓겨났으나 곧 풀려났다. 조선 태조 초에도 역시 총애를 받아 벼슬이 도평의사사사(都評議使司事)에 이르고 가락백(駕洛伯)에 봉해져 항상 가마를 탄 채 궁궐에 드나들었다. 후에 정도전(鄭道傳)의 난에 관련되어 삼군부(三軍府)에 의해 효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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