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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알고 싶었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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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5/11/26
 



귀주대첩 - 강감찬 고려를 지키다.


 한반도를 넘어서 대륙으로 진출하고자 하였던 고려, 그리고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려를 쳐야만 했던 거란, 양대 세력의 전쟁은 무려 20년이 넘게 진행되었다.
 거란은 총 3차에 걸쳐 고려를 정복하고자 하였지만 고려는 그때마다 그들을 이겨냈으며,영웅은 언제나 탄생하였다.

 거란의 1차 침입은 993년에 있었다. 그러나 서희는 그들의 목적이 전쟁이 아닌 봉건관계 체결이라는 것을 간파하였다. 또한 거란의 군사가 80만이라고는 하지만 정예부대는 8만 정도에 불과하였고, 이 정예부대는 안융진 싸움에서 대패하여 기세가 꺽인 상태이다.
 이에 서희는 거란의 총장 소손녕과 담판을 하여, 거란의 동경이었던 요양은 고구려의 땅임으로 고려에 복속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이같은 서희의 강경외교노선이 먹혀 들어 고려는 피를 흘리지 않고도 강동 6주를 얻는 성과를 얻었고, 이로 인하여 고려의 영토는 압록강까지 북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거란은 국호를 요로 고치며 더욱 강성해 졌다. 1010년에는 강조의 목종 폐립과 현종옹립을 구실로 총 40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하였다. 숫적으로는 1차 침입보다 적었지만 40만모두가 전투병력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병력은 오히려 더 많았다.
 특히  강조가 통주방면에서 패한것은 고려의 큰 위기였고, 고려는 개성까지 함락되어야만 했다. 이때 대신들은 현종에게 항복을 권유하기도 하였지만 강감찬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양규등이 후방에서 적의 보급을 끊고 유격전을 실시하여 적의 정예군을 격파하는 성과를 얻었다.
 이에 고려와 요는 화의가 성립되어 양국은 대등한 수준의 외교관계를 맺게 되었다.

 하지만 요의 고려 침공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1013년에는 여진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오기도 하였으며, 고려왕이 직접 내방하여 예를 갖추라는 요구까지 하였다.
 고려는 그때마다 요의 공격을 격퇴하는 한편, 개성에 나성을 축조하는 등 요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현종은 강감찬을 상원수로 삼고 20만명의 병력을 양성하였다.
 요나라 역시 소배압의 지휘아래 20만의 대군을 양성하였다. 소배압은 소손녕의 형으로써, 당시까지 단 한번도 패전을 기록하지 않은 무적의 장수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1018년 고려의 명운을 건 요나라와의 일대 접전이 펼쳐졌다. 강감찬은 우선 기병 1만 2천명을 선발하여, 요나라의 선발부대를 기습하였다. 이 전쟁에서 선발부대가 거의 전멸하자, 소배압은 작전을 바꾸어 직접 개성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소배압이 이끄는 본진이 매우 빠른 속도로 개성의 100리 밖까지 진격해 오자, 정면 대결이 불가피 해졌다. 그러나 강감찬은 개경일대에 이미 방어라인을 철저하게 구축시켜 놓았고, 소배압은 이 방어라인을 뚫지 못하였다. 그러는 사이 강감찬은 요군의 보급을 끊고 후방을 교란시켰다.
 
  일단 후방보급이 끊어지고, 혹독한 겨울의 추위와 청야작전으로 인해 요의 군사는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는 사이 이탈자도 속출하여 남은 병사는 정예병 10만여명이 전부였다. 결국 소배압은 남은 병사를 보존하여 후일을 도모하기로 하고 퇴각을 결정하였다. 그런데 소배압에게 뜻밖에 좋은 첩보가 들어왔다.
 바로 귀주성이 비어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이대로 아무성과 없이 요국으로 돌아간다면, 문책은 물론이고 패전의 책임을 물어 죽음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소배압은 귀주성이라도 점령하여 작은 성과를 거둘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강감찬 장군의 준비된 빈성정책이었다.

 고려군의 허실만을 보고 그 뒤에 숨어있는 함정을 눈치체지 못한 소배압은 그대로 귀주성으로 총 병력을 집중시켜 밀고 들어갔다. 이날은 1019년 2월 1일, 고려사에 있어 최대의 승전이 기록된 날이다.
 마치 독안에 든 쥐처럼 성안에 가두켜진 꼴이 된 요군은, 그들의 전략중 가장 큰 부분이라고 할수 있는 기마대의  공간장악능력을 상실하였다. 더구나 좁은 장소에 10여만명이 움집함으로 인해서 군대의 대오가 크게 훼손되어 버렷다.

 그리고 이때 고려군은 사방에서 포위하여 총 공격을 단행하였다.소배압은 결사적으로 퇴로를 뚫고 후퇴하였지만, 고려군은 귀주 동쪽방면에서 추격에 추격을 거듭하였다. 더구나 바람역시 고려군에게 유리하게 불어, 요군은 제대로 된 전투력을 발휘 할 수 조차 없었다. 이 하루밤의 전투에서 소배압은 수만여명을 잃고 말았다. 살아 돌아간 요군은 수천에 지나지 않앗으며,  소배압 역시 본국에서 징계를 받았다.

 이 엄청난 승리로 인하여 고려는 동방의 강국임을 천하에 알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강동 6성을 정비하고 천리장성을 축조하는 등, 내외에 국방력을 과시하였다.
 1019년 5월에는 요나라에서 화친을 제의하는 사절단이 왔으며, 동여진 역시 추장 나사불이 직접 입조하여 화의를 약속하였다.
 이에 고려현종은 말갈, 탐라, 흑수등의 복속민들 대표들을 입조시켜 그들에게 연회를 배풀어 주는 등, 고려의 위용을 천하에 알렸다.

 귀주대첩의 승리는 정보전과 기만술, 그리고 적의 침략에 대비한 정예병 양성이 종합적으로 맞아떨어진 대승이었다. 특히 적의 허위정보를 믿게끔 만드는 기만술은, 과거나 현재에 있어서 정보의 파악 능력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다는 중요한 교훈을 남긴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뛰어난 전략 뒤에는 그 전략을 수행할 수 있는 정예병 양성이 반드시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고려수호의 영웅 강감찬은 이 모든 것을 이루어낸 위대한 성웅이라고 할 수 있다.



강감찬
(姜邯贊 948∼1031(정종 3∼현종 22))

고려의 명장(名將). 초명은 은천(殷川). 본관은 금주(衿州).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궁진(弓珍)의 아들. 983년(성종 2) 문과(文科)에 장원, 예부시랑(禮部侍郎)이 되고, 1010년(현종 1) 거란(契丹) 성종(聖宗)의 침입에 조신(朝臣)들은 항복을 주장했으나 이를 반대하고 하공진(河拱辰)으로 하여금 적을 설득시키도록 하여 물러가게 했다. 그뒤 국자좨주(國子祭酒)·한림학사(翰林學士)·승지(承旨)·중추원사(中樞院使)·이부상서(吏部尙書)·서경유수(西京留守)·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를 역임하였고, 1018년(현종 9)에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으로 고려에 침공하자 이듬해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군사 20만 8000을 이끌고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무찔렀다. 1019년 회군(回軍)하는 적을 구주(龜州)에서 크게 격파하고 개선할 때 영파역(迎波驛)에서 왕의 영접을 받았으며, 검교태위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 식읍삼백호(檢校太尉門下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天水縣開國男食邑三百戶)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듬해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1030년(현종 21) 왕에게 청하여 개경(開京)에 축성(築城)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고, 1031년 특진 검교태사 시중 천수군개국후 식읍일천호(特進檢校太師侍中天水郡開國侯食邑一千戶)에 봉해졌다. 현종 묘정(廟庭)에 배향,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 《구선집(求善集)》 등이 있다. 시호는 인헌(仁憲).

강동육주 (江東六州)

고려 성종 때 평안북도 서북면(西北面) 해안지대에 설치한 흥화(興化)·용주(龍州)·통주(通州)·철주(鐵州)·구주(龜州)·곽주(郭州) 등 6주(州). 고려 때 군사상 교통상 요지였던 강동6주는 여진족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북방진출에 큰 장애가 되었다. 993년(성종 12) 거란의 1차침입 때 서희(徐熙)가 거란장군 소손녕(蕭遜寧)을 만나 압록강의 동쪽지방을 개척한 뒤에 거란과 국교를 열 것을 조건으로 고려는 강동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6주를 개척하였다. 그러나 6주 개척 후 거란과 국교를 맺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장흥(長興;泰川)·귀화(歸化;郭山)·선천(宣川;宣州)·안의(安義;定州)·흥화(興化;義州東)·구주(龜州;龜城) 등지에 강동6성을 쌓고 거란에게 적의를 보였다. 이에 거란은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어 약속불이행을 추궁하고 국왕이 친히 내조(內朝)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역시 듣지 않았으므로 결국에는 강동6주 반환을 요구하여 왔다. 고려에서 이를 듣지 않자 거란은 1018년(현종 9) 이래 3차에 걸쳐 여러 가지 구실을 내세우고 침입하였으나 번번이 고려의 항전으로 이득을 보지 못하였으며, 특히 제3차 침입 때 소배압(蕭排押)이 거느린 거란군은 구주(龜州)에서 강감찬(姜邯贊)에 의해 대파되어 돌아갔는데, 이를 구주대첩이라고 한다. 두 나라는 서로 적대관계에 지쳤기 때문에 고려는 거란의 연호를 쓰는 대신 거란은 강동6주의 요구를 철회하였으므로 강동6주는 계속해서 고려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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