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최강 몽골군대를 2번 격파하다!!>
<역사의 천존고>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고려의 자존 김윤후
1231에서1258년에 이르기 까지 28년에 걸친 대 원과의 치열한 항쟁. .... 13세기 당시 원제국은 인류의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가였으며, 가장 드 넓은 영토를 확보하고 있었으며, 가장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 원제국에게 무려 30여년간을 항쟁하였다것에 세계 역사속에서도 독 보일 위대한 업적일 것이다.
그러나 25년 항쟁사를 보다 자세히 살펴 보면 오히려 부끄러움을 발견하게 된다. 도데체 40년 동안 고려왕조와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최씨정권이 한일은 무엇인가? 그들은 1차 원의 침략 후 전쟁 상황이 여이치 않자 1232년 강화도로 천도하여 자신들의 안위에만 전력을 다하였다. 대원항쟁이 한창이던 1236년에 판각된 8만 대장경 역시 문화적으로야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될 만큼 우수한 것이지만, 냉혹하게 말하면 최씨정권이 열심히 기도해 줄테니 백성들이 알아서 나가 싸우라는 것이다. 차라리 그 돈으로 병장기를 만들고 정규군을 양성하여 후방깊숙히 침투한 몽고군의 배후를 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28년간의 항쟁사에서 고려 땅에 정규군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후 전개된 삼별초의 끈질긴 항쟁조차 사실 원의 명령에 의해 출병한 고려군과의 싸움이었다.
그처럼 모순되고 부끄러웠던 항쟁, 그처럼 무기력했던 정권, 그리고 일방적이고 참혹하였던 패배........ 그러나 오직 단 한명, 김윤후가 있었기에 우리는 대원 항쟁을 자랑스럽고 위대한 업적이라 말 할 수 있다.
김윤후 그는 백현원(白峴院)이라는 사찰의 수도승이었다. 그런데 1231년 원제국이 1차 침입을 한데 이어 1232년 다시 침입하였다. 특히 이번에는 1차 침입과는 달리 경상도 지역까지 남하하며, 강화도로 도피한 고려조정의 개경환도를 요구하였다.
고려조정은 이 요구를 거부하였지만, 그 외 어떠한 조치도 한 것이 없다. 따라서 육지에서는 온갖 약탈과 방화 그리고 살육과 간음이 자행되었다. 당시 몽고족의 풍습상 적지에서의 약탈은 정당한 것이었고, 결혼이나 아이가 있는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미인을 취하는 것은 자랑거리였다. 더구나 고려조정이 항복하지 않았음으로, 그에대한 보복은 당연한 행위였다. 그러니 백성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깊은 산속으로 피신 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사정이 그렇게 되자 민중들은 자신들의 목숨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무장을 시작했으니, 이것이 우리나라 의병이 효시였다. 즉 김윤후는 우리나라 최초의 의병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규 훈륜도 받지 못한 민간군이 세계 최강의 원제국 군대와 맞서 싸우기란 불가능하였다. 그런데 김윤후에겐 오직 단 한번 뿐인 기회가 오고 있었다.
몽골장군 살리타이[撤禮塔(살례탑)]그는 고구려 원정군의 대원수였고 1차 고구려 원정 당시에도 의주와 귀주등을 함락시키고 개경을 포위하여 고려조정과의 화의를 성립시킨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김윤후가 있는 처인성(處仁城,지금의 경기도 용인지역)으로 오고 있었다. 당시 처인성은 집단 노예촌인 부곡이 있던 지역이었다. 하지만 전략적인 요충지이고, 또 부곡이란 곳은 단순 노비뿐 아니라, 각종 기술을 보유한 기능공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는 매우 중요한 생산기지였다. 김윤후는 그곳에서 매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직 한명 살리타이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단 한번의 기회..... 그러나 그는 단 한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가 쏜 화살을 여지없이 살리타이의 심장을 꾀 뚫었다. 대원수를 잃은 적들은 단번에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기회를 틈타 총 공격을 가하자 여지없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부곡은 전공을 인정받아 현으로 승격되었다. 이것은 고구려 역사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파격적인 조치였다.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리 뛰어난 기능을 갖고 있어도 노예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현으로 승격받음으로써 일반민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부곡이 현으로 승격한 예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전공으로 인해 영구적으로 현으로 승격된 예는 없다.
이후 김윤후역시 상장군이란 높은 직책을 하사 받지만, 오히려 공을 사양하였다. 그러나 김윤후는 21년 후인 1253년 원제국 5차 침입당시 다시 등장한다. 당시 김윤후가 맡은 직책은 충주산성의 방호별감(防護別監), 처음 제수 받은 상장군과는 비교가 안되는 낮은 직책이었지만 그것은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하였다.
중요한 것은 충주를 지켜내느냐 아니면 적에게 뺴앗기고 마느냐는 것이었다. 충주는 삼국시대부터 한반도의 중원으로 불리며 매우 중요하게 여기던 곳이다. 그곳을 빼앗기게 되면 한반도 남부까지 점령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한마디로 최씨 무인정권이 권력승계만을 신경쓰고있던 강화도만 남는 것이다.
그리하여 김윤후는 충주 민간군을 이끌고 70여일에 걸친 길고 긴 항쟁을 하게 된다. 정규군이라고는 별감직을 제수 받은 김윤후 자신과 몇명의 관병이 전부였다. 모든 전쟁은 민간군이 자발적으로 해야 한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70일간의 기나긴 항전으로 인해, 성안의 식량사정은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더구나 오랜 싸움으로 지친 사람들은, 원 제국군의 끝없는 항복권유에 동요되고 있었다. 이 때 김윤후는 성안에 있던 노비들을 불러 모은다. 그는 일찌기 처인성 전투에서도 경험한 바 있지만, 노비들이 전투력이 매우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문제는 싸우겠다는 투지를 불어 넣어 줄 방법이다. 따라서 그는 노비들에게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였다.
“죽음을 무릅쓰고 전승을 이룩한다면 귀천 없이 모두 관작을 제수하겠다”
그리고 그 증거로 김윤후는 즉각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노획한 말과 소를 고루 나눠 주었다. 이 것은 당시 엄격하였던 신분제 사회 질서상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가 승려 출신이였던 것이 이런 신분제적 질서를 뛰어넘는 발상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말에 크게 감동을 받은 노비들은 앞을 다투어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에 임하였다. 노비출신들의 군대가 용맹하게 싸우자 다른 민간군들도 다시한번 투지를 불태우며 전투에 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몽고군은 충주성의 점령을 포기하고 본국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세계 최강의 군대를 상대로 거둔 명백한 승전보 였다. 그리고 김윤후가 했던 약속역시 지켜졌다. 우선 충주가 국원경으로 승격돼 집단적인 포상을 받았음은 물론이고, 개개인중에서도 전공이 뛰어난 자는 신분에 관계없이 포상을 받게 되었다.
김윤후 역시 그 공으로 상장군(上將軍)이 되고 뒤에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에 임명되었으나 그때 동북면은 이미 몽골의 수중에 들어갔으므로 부임하지 않았다. 원종 때에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으며 우복야(守司空右僕耶)로 벼슬에서 물러났는데 정확한 사망연대는 알 수가 없다.
아마도 결국은 패전으로 끝난 대몽항쟁을 보며, 쓸쓸하게 승려의 한사람으로 생을 살다가 갔으리라.... 그러나 역사에서 결과는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궂이 결과론을 고집한다면 그 옛날 대제국을 건설하였던 몽골이 지금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가? 결과론을 거론하자면 가장 최종시점인 현재에서 평가해야 된다. 그러니 역사에서 결과론을 고집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또한 총 7차의 대몽항쟁중 2차와 5차는 명백한 고려의 승리이다. 그리고 그 승리를 이끈 것은 고려왕조도 최씨무인정권도 아닌 평범한 백성들과 천대받던 노비들과 특수부락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비록 신분제 사회속에서 그것을 당연한 숙명으로 여기며 살았겠지만, 승리의 그 순간만큼은 이 땅이 주인이 바로 그들이었음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김윤후가 있었다. 김윤후는 바로 고려의 자존을 지켜냈던 것이다.
김윤후 (金允侯 ?∼?) 고려시대의 승장(僧將). 일찍이 중이 되어 백현원(白峴院)에서 수도(修道)하다가 몽골 침입 때 몽골장군 살리타이[撤禮塔(살례탑)]를 처인성(處仁城;龍仁)에서 죽였는데, 그 공으로 임금이 상장군(上將軍)을 주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뒤에 섭랑장(攝郞將)을 거쳐 충주산성의 방호별감(防護別監)으로 있을 때, 몽골군이 성을 포위하고 70여 일을 공격했으나 군민이 일치단결하여 성을 사수하고 몽골군을 격파했다. 그 공으로 감문위(監門衛) 상장군(上將軍)이 되고 그 밖의 군공을 세운 자는 관노·백정에 이르기까지 상을 받았다. 뒤에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에 임명되었으나 그때 동북면은 이미 몽골의 수중에 들어갔으므로 부임하지 않았고, 원종 때에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다. 이듬해 수사공우복야(守司空右僕耶)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