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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읽기자료1
소중화의 진정한 의미
2008/02/11 오후 5:04 | 역사읽기자료1

소중화와 민족주의...

(내멋대로 한국사에서 퍼온 글입니다.)


간단한 상식문제 하나 내겠다. 부모가 돌아가면 누가 제사를 모실까?

당연히 큰아들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그 집안을 잇는 계승자. 설사 친아들이라 할지라도 집안을 잇지 못하면 제사를 모시지 못한다. 생판 남이라 해도 성을 물려받고 집안을 잇게 되면 부모는 물론 그 조상들의 제사도 받든다.

조선이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제사를 모셨다. 이미 명이 사라진 상태에서. 명의 명맥이 끊긴 가운데 조선이 명 황제의 제사를 모셨다. 그렇다면 이건 무슨 의미일까?

흔히 소중화라 하면 사대주의의 상징인 양 이야기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소중화를 천명하던 시기 조선은 청에 대해 사대하면서도 마음속으로까지 승복하지는 않았다. 제아무리 대국이고 천자를 칭하고 있어도 여전히 청은 북쪽의 야인들이 세운 오랑캐의 나라일 뿐 중화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원래 중화라 하는 것은 중국의 높은 문명을 뜻하는 것이었다. 유교문화권에 있어 문명이란 유교 그 자체였고, 유학의 발상지이며 유학이 가장 고도로 발달한 중국은 동경의 대상이며 본받고 따라야 할 절대적인 가치였다. 근대 사상가들이 유럽과 미국 등 보다 일찍 근대를 연 나라들을 그들의 정신적 근본으로 삼았던 것처럼 유교라는 하나의 사상을 추구하는 이상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지식인의 본능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중화의 적통을 이은 명이 망해 버렸다. 명이 망한 건 좋은데 그를 대신해 들어선 것이 사람도 아닌 오랑캐에 불과한 야인 - 만주족의 청이었다. 여전히 중국은 청이라는 이름으로 지배자만 바뀐 채 남아 있지만, 오랑캐가 사람이 될 수 없으니 이미 중국에는 중화가 남아 있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런 상황에 중화를 본받아 중화에 버금가게 된 작은 중화 소중화가 남아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물론 큰 중화가 있을 때야 작은 중화는 스스로를 낮추어 복종하는 모습이 굴종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17세기 조선의 지식인들이 스스로 소중화를 강조할 무렵에는 이미 중화가 남아 있지 않았다. 중화가 사라진 상태에서 오로지 조선의 소중화만이 남아 있으니 당연히 당시 조선 사대부들에게 있어 조선만이 유일한 중화이고 문명국이 된다. 다시 말해 소중화라고 하는 것은 더 이상 중국에 중화가 남아 있지 않으니 조선만이 중화이고 문명국이라고 하는 자부심에 찬 오만한 선언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제껏 중국에 예속되어 있던 조선이 중국으로부터 정신적으로도 완전히 독립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니. 아니 중국만이 아니라 왜란과 호란의 양란을 거치면서 적개심이 높아져 있던 만주족, 일본과도 스스로를 완전히 분리하게 됨으로써 이때에 이르러 현대로 이어지는 어떠한 민족의식이 형성되었다 할 수 있다.

실제 서포 김만중만 하더라도 스스로 한글소설 "구운몽"을 쓰며 정철의 "사미인곡""속미인곡""관동별곡"의 한글가사들을 조선의 이소라며 극찬했었다. 천지를 감동시키고 귀신과 통할 수 있는 것은 중국만이 아니라고, 나무꾼이나 아낙네의 노랫소리를 학자들의 시부보다 더 높이 평가하기도 했었다. 비록 조선 후기 경제적으로 발전하면서 조선의 서민문화가 발전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글소설이 헤아릴 수 없이 쓰여지고 읽혀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변화는 미술에서도 나타났다. 정선과 같은 이는 중국의 그것이 아닌 조선의 산수를 직접 화폭에 담아 내었고, 신윤복과 김홍도도 이전까지 중국의 화풍을 베끼는 것에서 벗어나 조선의 사람들과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김정희는 왕희지니 구양수니 하는 중국의 글씨체를 받아 쓰던 것에서 나아가 추사체라고 하는 자신만의 서체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유득공이 "발해고"를 저술하며 "발해"를 조선의 역사로 편입시키려 한 것도 또한 이 무렵이다. 역사에 있어서도 중국 중심의 사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가 발해를 통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심지어 유학에 있어서도 숙종 연간의 백호 윤휴와 같은 이는 "주자만 알고 나는 어찌 모른단 말인가?"라며 주자의 절대성을 부정하며 유학의 경전을 독자적으로 해석하기도 했었는데, 당시 사대부들 가운데 많은 수가 윤휴를 지지함으로써 종주국이랄 수 있는 중국으로부터 학문적으로도 독립하고자 하는 일련이 움직임이 있었음을 증명해준다. 하기야 이미 그 이전에 퇴계가 주리론으로써 중국의 성리학과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고, 율곡에 이르러 완전히 독자적인 체계를 갖추게 되었으니 새삼스런 일도 아닐 것이다.

송시열이 송자로 추증된 것도 사실 이러한 움직임과 관계가 있다. 자라고 하는 것은 학문적으로 그 성취가 높은 대종사에게나 붙여지는 칭호로서 공자와 맹자 이후 주희가 겨우 주자라 칭해졌다. 그런데 변방에 불과하던 조선의 유학자를 두고 송자라 높였으니, 아마 이전의 사대부들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으리라.

이게 그거와 무슨 상관이냐는 사람도 있겠다. 진경산수며 한글소설이며 그것이 소중화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그러나 사회의 변화라는 건 결국 의식의 변화를 따른다. 이제껏 중국을 따르고 베끼기만 하던 유학자들에게 있어 스스로를 돌아보고, 스스로의 안에서 가치를 찾는다는 것은 거의 혁명적인 의식의 변화를 필요로 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어떠한 계기, 그것이 바로 소중화였다고 하는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19세기 개항기를 맞아 위정척사운동으로 이어지는데, 위정척사운동이란 조선이야 말로 중화를 받드는 문명국이고 서구 열강은 한낱 오랑캐에 불과하니 감히 용납할 수 없다고 하는 소중화의 연장이었다 할 수 있었다. 개항을 하고 외세가 밀려들며 조선의 국체가 위기에 몰리고부터는 의병항쟁등의 저항운동을 주도하기도 했으니, 경술국치 이후로도 일본에 의한 근대화라는 명분에 현혹된 많은 개화파 인사들과는 달리 끝까지 불타협의 입장을 견지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를테면 한국 민족주의의 정통인 셈이다.

물론 한계는 있었다. 현실에 있어 청은 조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국이었고, 문물에 있어서도 한참 앞선 선진국이었다. 구한말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 역시 조선으로서는 감히 어쩔 수 없는 강국이며 선진국들이었다. 소중화만을 주장하고 그 알량한 자존심만을 끌어안고 있기에는 현실은 너무 가혹하고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스스로 바꾸어야만 하는 상황에 바꾸지 못한 그 오만과 집착이 조선을 끝내 멸망으로 몰아갔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서 고려시대 원형질이 형성된 우리 민족이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게 된 것도 사실이다. 중국으로부터도 정신적으로 독립하고, 만주족이나 일본인과도 구분지어 생각하게 되면서,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에 두고 배타적이고 자존적인 어떠한 자긍심을 갖게 되면서, 지금 우리가 아는 오롯한 "민족의 정체성"이 만들어지고 지금에 이어진 것이니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소중화는 스스로 낮추어 굴종하는 비굴함의 표현이 아니다. 세상에 문명국이란 중국과 조선밖에 없으며, 중국 - 명이 망해 사라진 이상 오로지 조선만이 문명국이라고 하는 어찌 보면 주제모른다 할 수 있는 자존의 표현이었다. 그것이 지금에 이르러 한국인의 민족의식으로 이어진 것이고. 차라리 사대주의라 한다면 조선의 모든 것은 하찮으니 중국을 배우자 하던 북학파이거나 이제까지의 조선을 모두 버리고 서구열강을 배우자던 구한말의 개화파를 두고 사대주의자라 하는 것이 옳으리라. 물론 조선 전기 조선의 발전에 고려를 부정하고 중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던 사대부들의 역할이 컸듯 북학파나 개화파 역시 지금의 대한민국을 건설하는데 큰 역할을 했지만 말이다.

요컨데 균형이라는 거다. 자존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와 개방적이고 조금은 자기부정적인 세계주의와. 전자는 자신을 지키고 후자는 자신을 발전시킨다. 발전이 필요할 때는 스스로를 열어 다른 이를 배우고, 지켜야 할 때는 스스로 높이고 닫아 스스로를 지키는. 어느 하나라도 부족할 때 역사는 왜곡되어 버린다. 이미 100년 전 그를 경험하지 않았던가. 소중화란 그런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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