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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읽기자료1
사대 아니 오만때문에
2008/02/11 오후 4:56 | 역사읽기자료1


과연 사대주의 때문이었을까?

( 내멋대로 한국사에서 퍼온 글입니다.)

흔히 서인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명과 후금 사이에서 등거리외교를 펼쳤던 광해군을 부정하고 친명배금정책을 취했던 것을 두고 사대주의때문이라고들 한다. 성리학과 서인의 경직된 사대주의가 오히려 떠오르는 신흥강국이었던 후금을 무시하고 친명일변도의 정책을 취함으로써 정묘, 병자 양란을 불러일으켰다고. 그 사대주의 때문에 조선후기 정치와 사회가 경직되었고 결국에는 그로 인해 멸망했다고까지 말하는 사람마저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원래 사대라는 말은 <맹자(孟子)>의 양혜왕장구하梁惠王章句下편에서 유래한 말이었다. 대충 적어보면 이렇다.

齊宣王問曰 交隣國有度乎?
제 나라 선왕이 물었다. 이웃나라와 사귐에 도가 있는가?

孟子對曰 有. 惟仁者爲能以大事小, 是故湯事葛文王昆夷. 惟智者爲能以小事大, 故大王事훈육句踐事吳以大事小者 樂天者也. 以小事大者 畏天者也. 樂天者保天下 畏天者保其國. 天者理而已矣 大之字小 小之字大 皆理之當然也
맹자가 대답했다. 있습니다. 오직 어진자만이 대국을 가지고서 소국을 섬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탕왕이 갈나라를 섬기고 문왕이 곤이를 섬겼습니다. 또 오직 지혜있는자만이 소국을 가지고 대국을 섬길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태왕이 훈육을 섬기고, 월나라 구천이 오나라를 섬긴 것입니다. 대국으로서 소국을 섬기는 자는 천리를 좋아하는 것이요, 소국으로서 대국을 섬기는 자는 천리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천리를 좋아하는 자는 온 천하를 보전하고, 천리를 두려워하는 자는 자기나라를 보전합니다. 天은 理일 뿐이니, 대국이 소국을 사랑함이나, 소국이 대국을 섬기는 것은 모두 理의 당연함이다.

혼란스럽기만 하던 전국시대 날이 새면 전쟁이고, 날이 지면 전쟁으로 죽어간 사람들의 곡소리가 구슬프게 울려퍼지던 그 시대, 많은 지식인들은 이 전란을 어떻게 끝낼 것인가를 고민했다. 맹자의 이소사대 사상도 그렇게 나온 것이다. 왕도정치를 국가간에도 확대해 적용함으로써 대국은 소국을 어루만지고, 소국은 대국을 섬긴다고 하는, 현실적인 힘을 전제한 새로운 국제질서를 제안한 것이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사대주의의 시작이다.

그런데 이 말대로라면 조선은 당시 한창 일어나고 있던 후금을 무시해서는 안 되었다. 임진왜란의 피해조차 다 복구하지 못한 조선에 있어 명까지 위협하고 있던 후금은 분명 대국이고 강국이었으니까. 아직까지는 명이 더 크고 강하기는 하지만 앞으로 어찌될 지 모르는 상황에 후금과 적대한다는 것은 사대라고 하는 원칙에 어긋난다. 그럼 왜? 왜 서인은 후금을 배척하고 오로지 친명 일변도의 외교정책을 취한 것일까?

사실 친명배금은 서인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광해군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북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권신 이이첨이나 산당 정인홍이나, 심지어 광해군의 왕비조차 사석에서 광해군더러 재조지은을 지켜야지 어찌 후금과 가까이 할 수 있느냐며 광해군의 정책에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아주 소수, 광해군의 뜻에 동조하는 것은 정작 북인 가운데서도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오죽하면 광해군 스스로가 후금과 화친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커밍아웃까지 해야 했을까.

다시 말해 당시 조선 사회에서 광해군과 그를 따르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명의 재조지은을 잊어서는 안 되며, 명과 적대하는 후금과는 결코 화친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거의 일반적인 정서였던 것이다. 그것은 북인 역시 마찬가지였고, 사실상 외교정책에 있어 광해군은 자신의 친위세력이랄 수 있는 북인에게서조차 고립된 처지였던 것이다. 그러면 왜 가장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정치집단이었다 북인조차, 자신들의 권력기반이랄 수 있는 광해군에 반대했던 것일까?


흔히 어른들이 하는 말 가운데 "금수만도 못한 놈!"이라는 게 있다. 어른들이 지켜 온 어떠한 가치 - 즉 유교에서 온 - 를 스스로 지키거나 실천하지 못할 때 바로 나오는 말이다. 성현의 도리를 배우지 않고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으며, 성현의 도리를 배우지도 익히지도 않으면 금수만도 못한 존재가 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른바 인물성론이라는 것인데, 그것은 당시 유교문화권에 있어 세계를 보는 기본적인 시각이라 할 수 있었다.

간단히 근세 이전 유럽의 종교를 떠올리면 된다. 기독교를 믿는 것은 사람이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이슬람을 믿는 사람은 형제다. 이슬람을 믿지 않는 것은 단지 이교도일 뿐이다. 더 나아가 백인만이 인간이며 피부색이 노랗든 까맣든 그건 인간이 아닌 하등한 짐승에 불과하다. 지금도 그러지 않은가. 문명화되지 않은 세계, 혹은 우리와 같이 현대문명의 혜택을 입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같은 인간이라는 생각 자체가 생경한 경우가 많다.

그것은 전근대 유교문화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여서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 인간이란 "문명화"된 인간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 문명이란 중국에서 나온 "유학"을 뜻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유교문화권이다. 따라서 유학을 알지 못하고 배우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 다시 말해 유교화되지 못하고 중국화되지 못한 민족이나 국가는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으데 인간이 되지 못하는, 그래서 사람이 아닌 물物이 되어 인물성론이 나오게 된 것이었다.

한 마디로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 후금 - 여진은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으되 사람이 아닌 금수였다. 지금도 고양이나 개를 반려동물이라며 가족이라 하면 이상한 놈 보겠다는 듯 보는 사람이 있다. 사람은 사람, 짐승은 짐승, 그것은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고, 따라서 후금 - 여진을 동등한 입장에서, 아니 보다 우월한 존재로서 인정하고 화친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말도 안 되는 불경 그 자체였던 것이다.

생각해 보라. 정묘, 병자의 양란으로 철저히 당하고서도, 그리고 사대의 대상이던 명이 멸망하고서도 조선은 명에 대한 사대를 포기하지 않았다. 청이 강성하여 감히 어쩔 수 없는 실체로서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청에 사대하기보다는 여전히 명에 사대했다. 고려로 돌아가 보자. 사대주의자라 욕먹던 김부식이 금에 대해 어떤 입장이었던가를. 금 이전 수없이 전쟁을 치렀던 요에 대해서는 어떠한 입장이었던가를. 그리고 정묘, 병자 양란 이후의 조선의 모습을.

그것은 말하자면 미국 남부의 인종주의자들더러 흑인과 친구가 되어 사귀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아니면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게 원리주의 기독교 신자와 친구가 되어 한 집에서 함께 살아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하는 것과도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조선 사대부들에게 후금 - 아니 청이란 그런 존재였다. 그러니 서인이나 남인은 물론이고 상대적으로 이론이나 명분보다는 실질을 더욱 추구했다고 하는 던 북인마저 후금과의 화친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 역시 성리학을 배운 유학자였고, 후금과 화친한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딛고 있는 세계 그 자체를 뒤집어 엎는 폭거라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한 마디로 당시 조선이 후금에 대해 배척하고, 명에 대해서만 오로지 사대한 것은 사대주의 때문이 아니라 명 다음의 문명국가라는 오만함의 결과였다. 임진년과 정유년에 있었던 평소 사람으로도 생각지 않았던 왜에 의해 일어난 큰 전란은 조선 사대부들의 자존심을 크게 건드려 놓았고, 그것이 거꾸로 후금에 대해 더욱 강경한 태도를 취하며 문명의 종주국이랄 수 있는 명에 대한 사대를 강조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바로 명 다음의 유일한 문명국가라는 자부심 하나를 위해.

사실 사대주의라 한다면 19세기말 나타난 북학파가 진정한 사대주의자들이라 할 수 있다. 북학의든 열하일기이든 보면 청의 앞선 문물에 대한 동경과 존모가 고스란히 읽히고 있으니. 어찌나 청을 동경했던지 조선의 모든 것은 하찮고 바꾸어야 할 것들이고, 그렇기 때문에 청을 본받아 모든 것을 바꾸어야 한다는 혁명적인 주장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청은 금수이며 오랑캐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는 다른 유학자들에 비해 이들이야 말로 사대주의의 본질에 가깝다 할 수 있지 않을까?

북학파만이 아니다. 그러한 전통은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의 모습에서 조선의 미래를 보았던 김옥균, 박영효 등의 급진개화파들이나, 미국을 방문하고 그 발전한 모습에 감복하여 미국예찬자가 되어 버린 유길준, 서재필 등에게로 이어진다. 보다 강하고 보다 발전되고 보다 앞선 상대에 대해 스스로 굽히고 배워 따르는 것이야 말로 사대의 근본이라 할 때 이들이야 말로 사대주의의 전형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조선 후기 이들이 조선사회의 주류가 되지 못한 것, 이미 이 시기에 이르러 사대라고 하는 것이 의미를 잃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사실 이것은 조선이 스스로 독립하여 독자적인 세계관 - 민족주의의 원형을 형성하게 되는 데도 깊은 관계가 있는데, 이것은 나중에 설명하기로 하겠다.)

아무튼 당시 조선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라면 성리학적 세계관에 너무 깊이 빠져든 나머지 중국을 제외한 다른 여러 민족과 나라들에 무시하던 "오만함"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그것이 18세기를 지나 19세기 말 개항을 하고 나서까지 이어짐으로써 조선으로 하여금 스스로 바뀌어야 할 때 스스로 바꾸지 못하고 끝내 근대화에 도태되어 일본에 병합되는 결과를 가져왔으니 조선이 진정으로 혁파해야 했던 것은 바로 그 의미없는 "오만함"이었던 것이다. 이미 방향을 잃은 사대주의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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