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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멋대로 한국사
정조가 끝내 노론을 축출하지 못한 이유는...?
2007/11/24 오후 11:55 | 내멋대로 한국사
정조가 추구한 것은 오로지 한 가지 왕권의 강화였다. 노론에 의해 아버지인 장헌세자 - 사도세자 - 가 죽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던 정조이기에, 노론의 나라가 되어 버리다시피 했던 당시 조선을 다시 왕에 의해 다스려지는 왕의 나라로 되돌려 놓고 싶었던 것이다. 개혁군주라고 하는 것도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의 일련의 정책의 성과 때문이지, 정조의 모든 행위는 오로지 왕권의 강화 그 한 가지만을 위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의문이 남는다. 그러면 왜 정조는 그리 왕권강화를 추구했으면서도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는 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노론과 끝내 손을 잡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정조가 원하는대로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서도 노론을 축출하거나 배제하는 대신 노론의 일파인 김조순을 외척으로 끌어들여 그들과 타협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결국 이미 앞서 말한 대로 당시의 조선은 노론의 나라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고, 정조에게는 그들을 어떻게 할 만한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노론은 일찌감치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기호지방에 뿌리를 내린 이른바 기호사림에서 시작되었다. 이들 기호사림은 상대적으로 일찍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 당시 조선을 지배하고 있던 훈구파들과 싸우고 갈등하고 죽고 죽이는 과정에서 나름대로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선조 이후 이들 훈구파를 학연과 혈연등을 매개로 완전히 흡수하게 된다. 훈구파는 흔히 아는 것처럼 몰락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기호사림 - 즉 서인과 결탁하여 사림으로서 그 모습을 바꾸었던 것이다.
여기서 역사상식 하나, 그럼 훈구파의 특징은 무엇이었을까?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넓은 땅을 소유한 대지주라고 하는 것이었다. 공신전에, 권력을 이용해 황무지를 개간하고 간척사업을 벌여 농지를 늘리는가 하면, 농민으로부터 땅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하는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당시 조선 경제의 근간이랄 수 있는 농업경제를 장악한 것이 바로 훈구파였다. 그리고 그 재산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그 후손들에게 전해졌고, 후손들은 다시 서인으로 흡수되었고.
거기다 이처럼 스스로가 기호의 광대한 농지를 소유한 대지주였던 그들을 다시 기호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호남의 대지주들이 후원하고 있었다. 원래 호남은 영남과 마찬가지로 동인의 세력이 적지 않던 곳인데, 기축옥사로 호남 출신인 정철에 의해 호남의 동인들이 거의 씨가 마르다시피 하면서 서인이 주도하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소자영농이나 소작농에 유리하고 지주에 불리했던 대동법에 대해 서인이 반대하고 나선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기호와 호남의 농업생산을 장악한 위에 다시 시전의 상인들이 더해진다. 노론에 의해 주도되는 조정에 의해 금난전권이 제정되고 다시 노론을 견제하고자 했던 정조와 남인에 의해 금난전권이 폐지되는 과정은 시전상인과 노론과의 관계를 보여준다. 뿐일까? 만상도 있다. 원래 만상은 의주를 중심으로 청과의 국경지대에서 밀무역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아다시피 이런 밀무역에는 정치권력과의 결탁이 필수적이다. 노론계열의 북학파에 의해 저술된 북학의나 열하일기가 한결같이 무역과 상업의 발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다. 실제 영조 30년 책문후시를 공인했던 것이 다시 정조11년 수출물량이 너무 많아 내수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폐지되게 되는데, 금난전권이나 책문후시나 모두 정조에 의해 폐지되는 것을 주목해 볼 만하다. 당연하게도 책문후시가 폐지된 이후에도 만상에 의한 밀무역은 송상과 내상과 연결된 일본과의 무역로로 계속 유지된다.
한 마디로 당시 서인은 기호와 호남의 농업생산은 물론, 경상과 만상 등의 상업자본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경제 전반을 지배하고 있었다고 보면 된다. 당장 장용영만 하더라도 오군영이 모두 노론의 수중에 들어갔기에 궁여직책으로 왕의 친위대로서 창설한 것인데, 이미 이때에 이르면 오군영의 수뇌부는 거의 노론계열의 인사가 독점하고 있었고, 노론이 아니더라도 노론으로부터 녹봉 이상의 용돈을 받아 쓰는 이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오군영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들이기보다는 차라리 새로이 군영을 만드는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군영 뿐일까? 장희빈이 왕비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숙종에 대해 미인계를 쓰려 하던 남인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정작 장희빈에 의해 인현왕후 민씨가 밀려나는 상황에 이르자 노론은 당시 무수리로 있던 화경숙빈 최씨로 하여금 숙종과 동침을 하게 함으로써 반격을 한다. 역사란 때로 우연이면서도 우연이 아닌 경우가 적지 않은 법이라, 숙종이 무수리에 불과한 화경숙빈 최씨와 동침하고, 다시 숙빈의 첩지까지 내리기까지에는 미리 심어져 있던 노론 쪽 인맥이 움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물며 노론에 의해 태어났다 할 수 있고 노론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올랐으며 스스로 노론에 가까웠던 영조에 이르러서는 어떠했을까?
물론 돈만 있다고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아니었다. 돈도 돈이려니와 노론의 세력기만이 기호지방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당장 궁녀며 내시며 들일 때는 한양 인근에서 선발하여 들인다. 오군영 역시 대부분 근무지에서 가까운 한양 인근에 거주하는 사람들이었다. 기호와 호남의 농지며, 만상과 경상의 상업자본이며 모두 노론에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궁녀며 내시며 군사들이며 노론의 지역기반이랄 수 있는 기호지방에서 뽑혀 쓰인다. 돈과 지역기반이 만나게 되면 결국 강력한 인적 네트워크밖에 없다. 즉 무수리에 불과했던 화경숙빈으로 하여금 임금과 동침하게 하고 숙빈으로서 내명부에 이름을 올리게 할 수 있었던 바로 그 힘.
실제 정조가 즉위하고 홍계희의 손자 홍상범이 정조를 암살하려 할 때 궁녀와 내시 가운데 동조자가 나타났다. 즉 궁녀와 내시 가운데 이미 외부와 내통하는 이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왕의 암살에까지 가담할 정도로 외부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사건을 앞두고 매수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왕을 암살한다고 하는 사건의 중요성에 비추어 볼 때 그 이전부터 최소한 외부세력에 의해 심어졌거나 포섭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돈과 인맥,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여기에 한 가지가 더 남았다. 노론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추구했던 기본전략, "산림을 우대하고 국혼을 놓치지 않는다.' 그렇다. 노론이 송시열을 송자로 추존한 것은 성리학이 지배하고 있는 조선사회에서 학문적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였다. 송시열을 높임으로써 송시열을 따르는 자신들이 조선 성리학의 헤게모니를 쥐고 유림을 장악하고자 했던 것이고, 실제 노론은 명분으로서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유림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유림에 더해 노론은 국혼을 통해 왕실의 안방을 장악하고 있었다. 국혼을 할 때 왕명에 의해 금혼령이 내려지는 것은 기호지방에 한정되어 있었다. 궁녀며 내시도 마찬가지지만 왕비든 왕자비든 간택할 때 그 대상은 기호지방에 머무는 사대부에 한정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 후보감을 고르는 것도 원래 노론에서 나온 왕비며 왕대비며 대왕대비다. 당장 장헌세자의 비인 혜경궁 홍씨도 노론이었고, 영조의 계비로 정조의 강력한 정적이었던 정순왕후도 노론출신이었다. 정조의 비인 효의왕후며,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는 말할 것도 없다. 순원왕후의 아비가 세도정치를 연 김조순이었으니. 왕은 이씨의 왕이되 왕비는 노론의 왕비였던 것이다.
실제 정조가 즉위하고 바로 홍계희의 손자 홍상범에 의해 일어난 암살사건의 경우 궁 내부에서 궁녀며 내시까지 가담한 동조자가 10여 명이나 나왔는데, 사건을 앞두고 매수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왕의 암살이라고 하는 사건의 중대성에 비추어 볼 때 이미 오래전부터 궁 내부에 그들의 동조자가 침투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후 몇 차례 암살시도가 있은 끝에 정조가 소론의 대신을 모아 노론의 명분이 옳음을 설득하여 와해시킨 것은 그만큼 당시 노론의 위협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말해준다.
결국 정조가 김조순을 세자의 장인으로 삼아 특히 노론 시파를 외척으로서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한 것은 이러한 현실적인 한계 때문이었다. 힘이 없었던 것이다. 돈과 인맥, 명분, 더구나 왕실의 안방까지, 사실상 조선의 모든 것을 노론이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론을 축출하거나 제거한다고 하는 것은 조선사회 자체를 근본부터 뒤집어 엎는 혁명을 뜻하는데, 정조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이란 현실적으로 크게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아마 당시 노론을 견제할만한 시민사회라도 형성되어 있었다면 친위쿠데타라도 일으켜 볼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메이지 유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권력의 교체를 열망하는 새로운 흐름을 이용하여 스스로 세로의 시대의 중심에 서서 변화를 이끌어 다시금 새로운 시대의 중심에 왕권을 놓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인과 소론에게는 새로운 시대를 열만한 의지도 역량도 없었고, 그들을 대신할만한 어떠한 세력도 성장해 있지 않은 상태였다. 정조가 노론과 대립하여 그들을 제거하려 해도 그를 뒷받침할만한 어떠한 것도 갖추어지지 않은 채였으니 정조의 선택이란 노론과의 타협 이외에는 달리 없었던 것이다.
물론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그러한 정조의 시도는 정조 사후 정순왕후 김씨를 중심으로 한 노론 벽파가 정조가 이루어 놓은 모든 것들을 부정하고, 세자의 보호자로서 외척으로 끌어들인 김조순이 세도정치를 시작함으로써 모두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결국 노론이라고 하는 것은 정조 한 사람의 뛰어남이나 강력함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거의 절망과도 같은 현실의 벽이었다 할 수 있으니, 정조는 그 벽에 도전했다가 끝내 그 한계를 넘지 못하고 좌절하고 말았던 것이고 말이다.
흔히 조선의 정치라 하면 선비들이 공자왕맹자왈 헛된 소리나 늘어놓고 탁상공론이나 하는 것으로 알기 쉽다. 그러나 정치란 언제나 현실이다. 돈과 사람이라고 하는 현실적인 힘. 경영자든, 학자든, 연예인이든, 하다못해 백수한량이 정치를 해도 결국은 현실의 정치논리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정조가 노론을 어쩌지 못한 것도 바로 그러한 힘에서 밀린 결과다. 결국 그조차도 현실정치의 연장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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