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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읽기자료1
훈구파의 끈질긴 역사
2008/02/11 오후 4:29 | 역사읽기자료1

훈구파...

(내멋대로 한국사에서 퍼온 글입니다)


흔히 훈구파라 하면 조선 전기 조선의 정치를 담당한 조선의 지배층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알기 쉽다. 그러나 정작 훈구파가 등장한 것은 세조 이후, 조카를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함으로써 정통성에서나 도덕성에서나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던 세조가 정난공신들을 조정의 요직에 앉히고 이들로 하여금 국정을 주도하게 하면서다.

물론 세조 이전에도 공을 세워 부와 권력을 인정받은 공신은 있었다. 조선을 건국하는 것만도 큰 일인데, 다섯 째에 불과한 정안대군으로 하여금 태종이 될 수 있게 했으니 어찌 공신이 없었을까? 그러나 강력한 왕권을 원하는 태종에 의해 그 대부분이 제거됨으로써 세종 대에 이르면 거의 과거를 통해 등장한 성삼문, 신숙주, 최만리, 김종서, 맹사성, 황보인 등의 신진관료집단과 거의 교체되게 된다.

사실 태종에서 세종, 문종에 이르기까지 조선전기의 전성기를 이끌던 왕들은 하나같이 강력한 왕권을 누리던 왕들로서 이때의 관료집단은 왕명에 의해 자신이 맡은 바 국정을 수행하는 말 그대로 관료집단에 불과했다. 물론 공신이라는 이름처럼 차별된 권력과 부를 누리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왕권을 위협하거나 국정에 혼란을 줄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

문제는 문종의 뒤를 이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단종에 대해 그의 숙부들이 품어서는 안 되는 야심을 품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결국 수양대군에 의해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고 귀양 가 죽음으로써 선대 왕들에 의해 구축된 강력한 왕권은 크게 흔들리게 된다. 무엇보다 정통성과 도덕성에서 약점을 지닌 세종이 자신의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중국에 대한 사대를 강화하고 지역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토호들의 권리를 크게 양보하여 인정하는 한편, 자신의 친위세력인 정난공신들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키니, 이후 조선을 크게 약화시키는 빌미를 이때 제공하게 된다.

공신으로서 주어진 부와 권력에, 다시 그 부와 권력을 이용해 대토지를 겸병하고,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어 권력을 더욱 강화하니 세조 말에 이르러서는 이들은 왕권을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서 성장하기에 이른다. 바로 성종 이후 중앙정계에 진출하게 되는 사림과 대립하는 바로 그 훈구파다. 흔히 아는 것처럼 조선 전기 측우기를 만들고, 자격루를 만들고, 화차를 만들고, 신기전을 만든 그들이 아니라, 이때 등장한 부패한 권력집단이야 말로 훈구파인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그렇게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로 성장한 이들 훈구파는 연산군의 실정을 틈타 자신들의 힘으로 왕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을 세움으로써 그 권력의 정점에 이른다. 자신이 의도해서가 아니라 반정공신들에 의해 추대되어 왕위에 오른 중종 자신이 이들 공신들을 통제할 힘을 갖지 못하니 견제도 비판도 받지 않는 이들의 권력은 부정과 부패의 극에 이르게 된다. 조광주가 중종에 의해 중용되게 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다.

중종의 재위기간은 조광조가 등용된 잠시를 제외하고는 이들 훈구파의 전횡의 연속이었다. 박원종, 유순정등에 이어 남곤, 심정, 김안로가 정권을 멋대로 휘두르더니 말년에 이르러서는 장경왕후와 문정왕후의 두 외척 윤임과 윤원형의 대립에까지 하루도 바람 잘 날 없었다. 뭔가 생산적인 이유로 싸운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 죽이고 죽고 쫓고 쫓겨나고, 처음부터 왕이 될 위치가 아니었던 이가 타인에 의해 왕위에 오르게 되니 재위기간 내내 바람잘날 없이 훈구파에 의한 권력다툼만이 끝없이 이어졌던 것이다.

벌써 드라마로만 여러 차례 제작된 윤원형과 정난정의 이야기는 바로 이 시기 오로지 사리사욕만을 위해 정쟁만을 일삼던 훈구파의 한계와 문제점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린 명종을 왕위에 앉히고 수렴청정으로 정치를 농단한 문정왕후나, 문정왕후를 배경으로 온갖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던 윤원형이나 부패할대로 부패한 당시 훈구파의 전형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그리고 문정왕후의 사후 윤원형이 사사되는 것은 훈구파의 몰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일 것이고.

그럼 이들 훈구파는 과연 윤원형이 사사되고 선조 이후 사림이 주도권을 쥐게 되면서 교과서에 나온 것처럼 그대로 사라졌느냐?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지게 된 배경이 바로 이 훈구파를 두고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북인과 남인이 정철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갈라졌던 것처럼, 일단 먼저 정계에 진출한 서인의 경우 훈구파에 대해 상대적으로 우호적이었고, 동인의 경우는 새로이 정계에 진출한 만큼 강경한 입장이었다.

결국 훈구파는 사림이 정권을 주도하게 된 사이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입장이던 서인에 흡수되게 된다. 당장 족보만 보면 알 수 있다. 사라졌다고 하지만 훈구파의 후손들은 여전히 조선 중기에도 관직에 진출하고 있다. 단지 이때는 훈구파가 아니라 학연이나 혈연으로 이어진 서인의 일부로서다. 그렇게 노론이 되고 시파, 벽파가 되며 완전히 몰락한 경우를 빼면 조선 후기까지도 그들은 명맥을 이어 지배층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훈구파의 성격을 정의하자면 첫째 중앙집권적이었다. 아무래도 그들의 권력기반이 중앙정계이다 보니, 중앙정계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할 수밖에 없다. 경제적인 기반을 지방에 둔 중소자영농으로서 유교적인 소양과 학자로서의 명성을 정치적인 자산으로 삼고 있던 사림과는 크게 충돌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더불어 그들은 왕당파였다. 왕을 능멸하기까지 하던 그들을 왕당파라 하면 이상하기도 하겠지만, 중앙정계에서의 그들의 위치라는 것은 결국 왕과의 거리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왕을 위해 공을 세우고, 왕과 인척관계가 되고, 왕의 총애를 받고, 결국 왕이 그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한 왕권이 강력할수록 그들의 권력도 강해지는 일종의 기생관계였다. 그런 점에서 왕을 사대부의 하나로 간주하던 서인은 불경하다 못해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존재였다.

어찌되었든 그렇게 훈구파를 비판하며 정계에 나선 사림들도 19세기에 이르러 그들이 권력을 쥐고, 왕권이 무너지자 마찬가지로 세도정치라는 훈구파와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이게 되니, 결국 훈구파든 사림이든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소수가 권력을 독점하는 전제왕조 자체의 근본적인 한계였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가 뭘 어떻게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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