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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성동이론...
(내멋대로 한국사에서 퍼왔습니다.)
성리학적 가치체계에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문명화된 인간이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문명이란 중화 - 즉 유교적 가치를 전제한 중국문명이니 성리학에서 말하는 인간이란 중화화된 인간만을 일컫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연히 중화화되지 못한 이민족들은 이 인간에서 제외된다. 이들은 인간이 아닌 존재 즉 물物로 분류된다.
조선후기 조선의 사대부 사이에서 격렬하게 일었던 인물성동이론은 이러한 성리학적가치관을 전제한다. 다시 말해 인물성동이론에서 말하는 인人이란 성리학이 말하는 인간 - 문명화된 인간이고, 물物이란 문명화되지 못한 그 이외의 존재 - 이민족, 특히 만주족을 가리키는 것이다.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놓고 중국의 문명을 중화라 하여 추앙하던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있어 야만인에 불과한 만주족이 명을 무너뜨리고 청을 세운 것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래서 청이 명을 대신해 새로이 중국대륙의 지배자로 확고히 자리잡고난 뒤에도 조선의 사대부들은 청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멸망해버린 명만을 중화로 인정하며 명이 멸망한 이상 오로지 조선에만이 중화라고 하는 소중화를 내세우기에 이르른다. 아무리 중국대륙을 지배하고 있어도 청은 어디까지나 오랑캐일 뿐 그들은 세계의 중심으로서의 정당한 지배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병자호란 이후 청에 사대하기를 100년이 넘어가면서 이러한 조선 사대부들의 생각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청에 사신으로 다녀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청의 부강함과 당시로서는 첨단이라고 할 수 있는 각종 문물들이 알려지면서 소중화라고 하는 우물안 개구리의 자기만족만으로는 메울 수 없는 청과의 크나큰 격차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다시 고민한다. 청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까를. 그러면서 나온 것이 바로 인물성동이논쟁이다.
먼저 인물성이人物性異란 사람과 사람 이외의 것은 그 본성이 다르다는 것으로, 물物에 속하는 만주족은 아무리 때빼고 광내고 번듯하게 차려입어도 어디까지나 오랑캐일 뿐 사람으로서 중화가 될 수 없다는 전통적인 주장이었다. 이에 반해 인물성동人物性同은 설사 오랑캐라 하더라도 결국 같은 사람이며, 중화화되었으면 그 역시 중화가 될 수 있다는 것으로서 아직까지 청과 만주족을 무시하고 적대하던 당시 조선에 있어 혁명적인 주장이었다.
아니 사실 인물성동이 사대의 근본이었다. 사대에서 말하는 것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김으로써 다툼을 없애고 궁극적으로 평화를 이룬다고 하는 것으로, 그에 따른다면 조선은 당연히 유일한 강대국인 청을 섬기는 것이 옳았다. 오히려 당시 조선사회의 주류를 이루던 제아무리 중국대륙의 지배자라 하더라도 청을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이 사대의 근본에서 벗어난 무모한 만용이었다.
어찌되었거나 이러한 논쟁의 결과 노론은 시파와 벽파 이후 다시 한 차례 분열을 겪게 되는데 이른바 말하는 위정척사론과 개화론이다. 위정척사론은 전통적인 인물성이론을 받아들여 소중화 조선의 전통을 오랑캐로부터 지키자는 것이며, 개화론은 어치피 오랑캐도 사람이고 문물이 앞서 있어 배워야 한다면 중화이니 오랑캐든 뭐든 배워야 할 것은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개화파의 선두에 북학파가 있었다.
사실 조선 전기간에 걸쳐 진정으로 "빨갱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들 북학파였다. 정조연간 근본주의로의 회귀를 꿈꾸는 정조를 거스르며 상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의 체제 자체의 혁신을 주장했고, 여전히 청을 적대하던 사대부들 사이에서 청을 인정하고 그들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특히 이들은 그때껏 조선을 지배하고 있던 사대부들에 대해서도 비판하기를 서슴지 않았는데, 그것은 세상이 바뀌는 것도 모른 채 자기 안에 갇혀 꿈꾸는 소리나 하고 있는 조선사회에 대한 그들의 질타였다.
물론 이들 북학파에도 비판할 부분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조선사회를 비판하고 청을 배울 것을 주장하는 건 좋은데, 그게 가끔 너무 나가는 면이 없잖아 있다. 심지어 쇠고기를 즐겨먹는 것조차 중국은 돼지고기나 양고기를 먹는다며 비판할 정도이니, 요즘 말로 하면 "청빠"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기야 그들은 어디까지나 유학자였다. 그들의 사고의 근저에는 유학이 있었으며 성리학이 있었다. 그들이 세상을 보고 느끼고 판단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성리학에 의한 것으로,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 역시 그래서 성리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앞서 말한대로 그러한 "청빠"적인 성향이야 말로 사대주의의 원리 그 자체일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성리학자로서의 한계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의 성향은 이후 개화파들에게도 전해져 조선의 개화에 있어 청을 따를 것이냐, 러시아를 따를 것이냐, 일본을 따를 것이냐 하는 친청파, 친러파, 친일파로 나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일제의 지배를 받아들여, 일본의 도움으로 근대화를 이루자고 하는 우리가 흔히 아는 친일파라고 하는 것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대표적인 개화파로 국권을 보위하는데 전력을 쏟던 박영효가 강제병탄 이후 자연스레 친일파로 변신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던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노론이라고 하면 보수를 연상한다. 노론이라고 하면 어쩐지 보수적이고 수구적인 아집적인 집단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노론이라고 해서 다 같은 노론이 아니었다. 시파와 벽파가 달랐고, 경기와 기호의 노론이 각각 달랐으며, 개화파와 위정척사파가 달랐다. 단지 드러난 모습이 집권당으로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모습들만이 주로 알려져 있기에 수구적인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을 뿐.
아마 정조가 아니었더라도 노론은 이후 계속된 이념논쟁을 통해, 혹은 현실적인 입장차이로 인해 계속 분화되지 않았을까 싶다. 북학파가 주도가 되어 또다른 분파를 만들 수 있고, 시파 안에서도 천주교에 대한 입장 차이가 당파를 나누는 기준이 될 수도 있다. 보수라고 영원한 보수가 아니고, 진보라고 영원한 진보가 아닌 것이다. 보수 안에서 진보가 나타나고, 진보 안에서 보수가 나타나는 것, 이것이 역사가 아닐까?
어찌되었거나 인물성동이론을 둘러싼 논쟁은 조선 후기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까지 조선 전반에 크나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것이 인문학이 갖는 힘이다. 기껏해야 공리공론에 불과하다 할 수 있겠지만 그러한 논쟁은 북학파를 만들기도 하고 위정척사파를 만들기도 했으며, 친일파를 만들고 의병을 만들기도 했다. 그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것들이 사람의 생각을 결정하고 행동을 결정하고 역사를 만들어 왔던 것이다.
아무튼 조선의 역사라는 것은 당쟁이 있어 더욱 깊이가 있는 것 같다. 단순한 권력다툼이나 이권싸움이 아니라 세계관과 세계관, 가치관과 가치관의 싸움이니. 그 세계관과 가치관을 알아가는 것만으로도 조선사를 공부하는 보람이 있을 것 같다. 조선이 어떻다 유교가 어떻다 단정짓고 외면하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을까? 그런 말을 하기에 아직 내 공부가 너무 좁고 얕기는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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