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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멋대로 한국사에서 퍼온 글입니다)
퇴계가 주창한 주리론 - 이발기종론 - 은 리理의 능동성을 전제한다. 원래 성리학에서 기와 리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현상과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세계로 말하자면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모든 물질적 형태와 움직임이 기일 것이고, 그것들을 존재하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어떠한 원리가 리일 것이다. 인간으로 따지면 인간이 갖는 감정이나 행동이 기일 것이고, 인간이 당연히 지켜야 할 어떠한 도리가 리일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성리학에서는 본시 리라고 하는 것은 기에 종속된 것으로 보았다. 보다 근본이 되는 원리이기는 하지만 현실에서 나타나고 작용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기이며 단지 리는 그 기를 통해 현실에 드러날 뿐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퇴계야 말로 정통 성리학에 있어서 이단이라 할 수 있었다.
퇴계는 리를 기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능동적으로 작용하는 어떠한 법칙으로, 리가 먼저 일어나 작용하고 기가 그 뒤를 따르는 것으로 보았다. 현실의 기가 작용하여 리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리가 있고 그것이 작용함으로써 그에 따라 기가 움직여 드러난다고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현실의 온갖 모순이라는 것은 리가 제대로 작용하지 않거나 부족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 리 - 인간의 본성을 갈고 닦음으로써만이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잠깐! 이렇게 써놓고 보니 뭔가 떠오르는 게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받아들여 초기 기독교의 철학적 기틀을 닦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빛과 어둠의 이원론이다. 즉 야훼의 의지가 이리 충만한 데도 세상이 그를 따르지 못하는 것은 그 의지 - 즉 빛이 골고루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여기서 야훼를 뜻하는 빛과 리가 어딘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퇴계의 후예라 할 수 있는 남인 가운데 천주교 신자가 많이 나왔다. 적극적으로 작용하는 원리로서의, 이 세계를 움직이는 근본적인 법칙으로서의 리를 추구하다 보니, 끝내 인간세계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보다 근본적인 존재 - 신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덕분에 한국은 세계역사상 유례가 없는 선교사의 포교 없이도 천주교를 받아들인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그렇다고 퇴계의 사상을 아우구스티누스와 비슷한 것이라 하는 것은 곤란하다. 퇴계의 사상에서 리라고 하는 것은 기와 공존하는 것이다. 즉 기를 이끌어내기는 하지만 리 혼자서 존재하지는 않는다. 또한 리를 발현시키는 것도 리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인간 세상에 드러난 현상 - 기를 바로 하기 위함이다. 신을 섬기는 것과는 다르다. 신이 아니라 그가 추구한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철학이었으니.
물론 퇴계의 후예라고 모두 천주교 신자가 된 것은 아니다. 리를 당시 조선을 지탱하던 성리학적 가치 그 자체에서 찾던 사람들은 도리어 천주교에 대해 적대적이기까지 했다. 신은 어디까지나 괴력난신의 하나일 뿐, 그것을 추종하여 도리를 이룬다는 자체가 그들에게는 말이 안 되는 일이었던 탓이다. 의외로 성리학에서는 괴력난신 - 신비주의를 무척 싫어한다.
어찌되었거나 그러한 퇴계학이 갖는 본질적 특성과 신이라고 하는 외적 존재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던 성리학적인 성향은 결국 천주교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천주교를 자기화하도록 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동학 = 곧 천도교다.
동학의 교리는 간단하다. 모든 인간이 한울님이라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본질적으로 신이며 그래서 존귀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밖에서 찾던 리 - 즉 신이 원래 퇴계학이 추구하던 바대로 인간 내면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원래 퇴계학에서 말하는 리라고 하는 것이 형이상학적인 존재디아 보니 그렇게 인간의 내면으로 돌아오면서 하나의 종교로서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인간은 신이 되고, 그래서 인간은 존귀하고, 성리학도 아니고 천주교도 아닌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종교 동학이.
물론 천주교나 동학이나 퇴계학 자체는 아니다. 오히려 퇴계학의 지엽말단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그러한 것들을 받아들이고 만들어낼 수 있었던 바탕에 퇴계가 추구한 능동적으로 작용하는 어떠한 원리 - 리가 있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자칫 한 발 잘 못 들이면 종교가 되거나 무당이 되어 버리는 주리론의 한계인 동시에, 보다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고 실현시키고자 하는 도학적 열망이 드러난 부분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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