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즐겨찾기 | 블로그홈 | 바로가기 바로가기 | 로그인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기 위해선 나 자신을 먼저 비워야 한다.
블로그  |  사진갤러리  |  동영상갤러리 방명록  |   즐겨찾기 추가
빨갱이 (bchs9027)
프로필      쪽지
 인기도 :
 이 블로그 점수주기
전체 글보기(334)
동영상자료
한국사수업
역사읽기자료1
인물한국사
국사진도핵심내용
사회진도핵심내용
역사읽기자료
역사사진자료
그림과함께하는역사수업
국사용어해설
답사와관련한자료
원주지역사
이런생각저런생각
설문
백만가지 주제
오늘 전체
방문자 37 80421
구독자 0 8
답글 0 147
참조글 0 0
HanRSS 로 구독하기Fish 로 구독하기
2008 09월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최근 답글 전체보기
복펌해가요 잘쓸께요 ..
너무 찻기가 어려워 ㅜ..
ㅋㅋㅋㅋ
잘읽었습니다. 스크랩해..
촛불시위주동자 가아무리..
다녀간 블로거 더보기
- 조긴철
- 나상실
- sky1223210
- c6248020
- kstooon
 즐겨찾기
 즐겨찾기 글모음
개설일 : 2005/11/26
 

역사읽기자료1
정조의 공과는 무엇일까?
2008/02/11 오후 1:06 | 역사읽기자료1

정조의 빛과 그림자...
(내멋대로 역사에서 퍼왔습니다)

조선이 중국의 명에 비해 두 배 이상 긴 시간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왕권이 약했기 때문이었다.

중국 역사를 보면 알겠지만 명 이전에도 황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다. 따라서 황제의 눈에 들면 누구든 권력의 중심에 설 수 있었고, 그 능력이나 인품을 검증받을 필요도 없이 권력의 중심에서 마음껏 국정을 농단할 수 있었다.

그래서 중국을 지배하는 것은 천자인 황제이되, 사실상 중국을 통치한 것은 황제의 가장 측근이랄 수 있는 환관이나 외척들이었다. 후한이 그래서 외척과 환관과의 싸움에 쇠약해지다 망해버렸고, 명 역시 환관의 전횡으로 말미암아 청류를 잃고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물론 청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다.

반면 조선은 왕권이 약했다. 아니 왕권이 약했다기보다는 신권이 강했다. 그래서 왕조차 견제를 받았다. 신하들 스스로도 서로를 견제했다. 작은 꼬투리만 있어도 신하들은 서로를 비판하고 심지어 왕에게조차 싫은 소리를 했고, 그래서 뒤로는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는 군자연하는 이들이 정권을 잡았다.

오죽하면 조선시대 최악의 폭군이라고 일컬어지는 연산군조차 중국이나 일본에 갖다 놓으면 그럭저럭 평범한 수준의 왕이 된다. 가장 멍청한 왕으로 꼽히는 철종이나 인조조차도 평균수준은 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만큼 신하들의 강한 견제가 왕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삼가고 경계하도록 강요한 때문이다.

또한 신하들 역시 마찬가지여서 조선시대를 통틀어 환관이나 외척이 설친 경우는 19세기 세도정치기밖에 없다. 태종이 외척의 씨를 말린 이후로, 그 이후 어느 왕의 치세에도 외척이 권력을 잡고 농단한 적이 없었다. 환관은 말할 것도 없다. 궁내의 일에 대해서면 모를까 국정에 대해서는 감히 나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다. 적절한 견제와 비판으로 당쟁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그들 스스로도 해 먹는 것을 자제하고 있었다. 당장 약점이 잡히면 공격해 들어오는데, 해 먹더라도 눈치를 보아가며 해 먹어야지. 적당히, 크게 탈 안 날 정도로만, 최소한의 명분 정도는 지켜가며 그래도 부정도 저지르고 부패도 저질렀다.

그런 것이 무너진 계기가 바로 탕평이었다. 말이야 좋다. 탕평. 붕당과는 상관없이 고르게 인재를 등용한다라... 분명 그로 인해 당쟁이 없어지기는 하겠지만 탕평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탕평의 주체인 왕권의 강화와 탕평의 대상인 신료들 사이의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말이 합의지 야합이다.

간단히 열린우리당, 아니 통합신당과 한나라당이 공평하게 의석이며 장관자리를 나눠갖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가장 강력한 두 정당이 의석도 장관자리도 공평하게 나누어 갖고 다투지 않는다. 그러면 과연 국정이 제대로 돌아갈까? 부정도 부패도 없고 민생법안도 무리없이 처리되고 만족스런 국정운영이 가능해질까? 그럴 거라면 일부 노빠를 제외하고 노무현의 과거 대연정 제안에 욕을 해댈 리 없었을 것이다.

결국 정조대 조선 전시기를 통해서도 유례없이 강한 왕권을 자랑했지만, 더 이상 비판도 견제도 없는 절대권력은 세도정치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정조의 개혁으로 말미암아 왕권이 강화되는 대신 관료시스템이 약화되기 시작한 때문이다. 국왕이 직접 국정을 챙기는데 관료라는 게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국왕과 국왕의 뜻을 받드는 친위세력만 있으면 되었지.

그와 같은 실수를 그로부터 100 조금 안 지나 그의 종손뻘 되는 흥선대원군이 저지르게 되는데, 풍양 조씨와 장동 김씨 신파를 등에 업고 국정의 중심에 올라 평소 생각하던 개혁을 수행하는 것은 좋았지만 그 역시 왕권의 강화에만 생각이 미쳤을 뿐 관료제의 복구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 그래서 흥선대원군의 개혁은 흥선대원군 개인의 신념과 판단에 의한 독단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고,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난 이후 민씨 일파가 정권을 잡으면서 흥선대원군이 그랬던 그대로 모든 것이 민씨 일파에 의해 농단되는 결과를 낳았다.

정조대에도 이미 정조를 왕위에 오르게 하는 데 공을 세운 것을 기화로 국정을 농단한 홍국영이 있었고, 그가 죽고 나서는 김조순이 외척으로서 어린 순조를 대신해 국정을 독점했다. 그나마 홍국영이야 정조라는 강력한 견제자가 있었고, 김조순은 사대부로서 어느 정도 소양은 있는 사람이기에 큰 문제가 없었지만 그 이후 풍양조씨에서 다시 장동 김씨로 이어지는 막잘테크는 조선을 멸망지경에까지 이르게 하는 원인이 된다.

사실 만일에 불과하지만 서양의 배들이 조선의 해안으로 몰려들 때 최소한 숙종 때까지의 관료제가 조선에 남아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지금도 가끔 하게 된다. 과연 그때처럼 서로 견제하고 감시하며 비판하는 책임을 가지고 국정을 운영하는 관료시스템이 그때까지 남아있었어도 그리 무기력하게 나라를 내주었을까? 비록 당쟁으로 시끄럽기야 했겠지만 월 할 지도 모른 채 허둥대느라 아무것도 못하는 꼴은 보이지 않았으리라.

여기에 또 하나 정조를 개혁군주라 정의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 정조의 정치적 성향이다. 그는 결코 진보적인 군주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매우 보수적인 군주였다. 그가 왕권의 강화를 지향하기는 했지만 오히려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초기 유학이 지향하는 바로 돌아가고자 하는 유교근본주의적인 신념에 의한 것이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기는 했었다. 당시 조선의 현실정치는 서인, 특히 노론이 장악하고 있었고, 그런 상황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누를 수 있는 새로운 논리가 필요했다.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현실이 아닌 보다 근워적이고 그러면서도 그들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논리가. 그래서 찾아낸 것이 복고적인 유학이고, 그래서 보다 근본주의에 가깝던 남인을 중용하여 썼던 것이다. 덕분에 당시 거의 빨갱이라 할 수 있었던 북학파의 박지원은 그런 정조의 근본주의적인 성향으로 인해 그의 문집이 불태워지는 수모까지 당했을 정도였다.

그런 이유로 솔직히 일부 사람들의 주장처럼 정조가 몇 년을 더 살았다고 해서 조선이 조금 더 일찍 개항하고, 그래서 보다 일찍 근대화에 성공해 구한말 겪었던 비극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까는 회의적이다. 정조 당대에도 여러가지 한계로 사실상 청으로부터 수입한 서적들조차 거의 봉인하다시피 했는데, 과연 정조가 오래 살아 있었다고 좀더 일찍 개항을 하게 되거나 하는 일이 가능했을까? 그의 친위세력 가운데 천주교신자가 있었다는 것이 고무적이기는 하지만, 역설적으로 기타 사대부 관료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던 그에게 개항은 상당한 모험이었을 터이니 말이다.

그래서 흔히 알기를 정조를 개혁군주라 하는 데 대해서 비판적인 사람도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조선을 그나마 유지해 오던 시스템을 부정해가면서 왕권을 강화한 결과 능력이 되지 못하는 후대의 왕에 이르러서 더 이상 그 나마의 시스템조차 작용하지 않는 막장을 만드는 데 그의 책임도 적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내가 생각해도 그것은 과한 비판이다. 분명 정조의 치세에서 경제, 군사, 문화, 정치,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중대한 변화들이 있었고, 그 대부분은 긍정적인 것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정조는 분명 개혁군주였고, 그가 조선사에서 차지하는 비중 역시 매우 긍정적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정조 이후의 왕들에 있어 그 부작용이 너무 크게 나타났다는 점인데, 거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적으로 정조의 개혁은 분명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정조의 개혁방향 자체가 옳았는가는 조금 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찌되었거나 그의 등장으로 인해 관료시스템의 붕괴가 가속화되었고, 당색마저 잃은 권문세가들은 오로지 자신들 일족의 이익만을 탐하게 되었으니까. 정조 사후 조선을 망국에 이르게 한 여러 정황들을 비추어 볼 때 그가 그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역사라는 건 함부로 판단할 게 아니라는 것. 특히 드라마나 소설은 일단 팔아먹기 위해 필요한 부분만을 편집해서 단편적이고 평면적인 내용만을 전하기 쉽다. 역사에 대한 소양이 부족한 사람은 거기에 낚여 파닥거릴 수밖에 없는 것이고. 조금 더 심층적인 다양한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공부가 그래서 필요하다.

요즘 <이산>이 인기리에 방영중이라길래 혹시나 걱정되어서 써봤다. 정조는 특히 특정 정치세력이 빠지기 쉬운 캐릭터인 터라. 이인화가 그래서 <영원한 제국>으로 낚시질 잘 했지.


  추천수 (0)  답글 (0)  참조글 (0)  스크랩 (0) http://kr.blog.yahoo.com/bchs9027/1398 주소복사 
인쇄 | 추천 | 스크랩
답글 보임/숨김 답글 (0)
이름   비밀번호   블로그
등록
참조글 쓰기
참조한 글
참조한 글이 없습니다.
블로그 통합 검색 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