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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읽기자료
우리의 궁궐
2007/12/05 오후 6:27 | 역사읽기자료

6백년을 이어오는 끈질긴 역사 현장
`경복궁(景福宮)`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경복궁은 사적 제 117호. 우리나라의 정궁(正宮)으로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1392년 조선을 건국하고 태조 4년(1395년)에 창건했다. 그러니까 2000년인 올해로부터는 정확히 605년 전의 일이고 경복궁을 찾는 순간부터 우리는 600년 전의 조선시대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경복궁은 선조 25년(1592년)인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버렸다. 그 후 273년 간이나 재건되지 못했다. 고종 5년(1868년)이 되어서야 창건 당시의 규모로 복원하고 같은 해 7월에 고종이 창덕궁에서 이곳 경복궁으로 옮겨왔다. 이 일은 대원군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고 '경복궁 중건'이란 이름 하에 당백전을 발행했으며, 국고를 많이 쓴다는 백성들의 비난도 받으며 어렵게 이루어진 일이다.
그러나 1895년 명성황후가 건청궁(乾淸宮)에서 시해 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도망가는 아관파천(1896년)을 단행하고 1년만에야 덕수궁으로 환궁하면서 경복궁은 또 다시 주인을 잃고 만다.

**우리모습 복귀로의 끊임없는 노력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을 강탈당하고 경복궁내의 200여 동의 전각이 파괴되고, 지금의 경회루(慶會樓)와 근정전(勤政殿)등 10여 동만 남았다. 게다가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를 지음으로써 경복궁(景福宮)의 수치는 극에 달했다. 원래 경복궁은 9만평이 넘고 모양은 거의 장방형으로 남쪽에는 광화문(光化門), 동쪽에는 건춘문(建春文), 서쪽에는 영추문(迎秋門), 북쪽에는 신무문(神武門)을 갖춘 멋진 모습이었다. 이 모습은 경복궁 내에있는 '북궐도'를 보면 더 자세히 알수 있다. 다행히 지금은 경복궁 복원 사업으로 경복궁이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1996년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했고, 그 자리에 흥례문(興禮門)을 복원하며 근정전도 복원 중이다. 경복궁을 하나하나 복원해 가는 것은 우리의 뼈대를 다시금 짜 맞추는 듯한 느낌이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적 문화유산
`창덕궁(昌德宮)`

"조선의 3대 임금인 태종 5년(1405)에 경복궁의 이궁(離宮, 궁성밖에 마련된 임금의 거처)으로 건립한 창덕궁은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건축으로, 자연 경관을 배경으로 한 건축과 조경의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며 특히 왕궁의 정원인 후원은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정원으로 손꼽힌다." 1997년 12월 6일, 창덕궁이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음을 알리는 비문에 적힌 글이다. 유네스코는 세계적으로 뛰어나고 보편적 가치가 있어 인류 전체를 위해 보호하여야 할 문화유산을 지정해 보호토록 하는데 창덕궁이 그 가치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그럼 유네스코에서 높이 평가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한 창덕궁의 건축과 조경'을 알아보자. 우선 우리나라의 정궁인 경복궁을 본 사람이라면 창덕궁의 배치가 경복궁과는 많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즉, 경복궁은 외전과 내전이 앞뒤에 놓이고 정문과 정전은 남북직선축상에 나란히 놓여 질서정연한 대칭적 구성을 하고 있는데, 창덕궁(昌德宮)은 대칭적 구성이나 직선축상에 건물배치를 하지 않고 지형 조건에 맞추어 자유로운 구성을 하고 있다.
전체적인 배치의 구분을 하면 인정전(仁政殿)의 동쪽에 외청과 선원전(璿源殿)이 있고 중앙부는 인정전(仁政殿) 일곽의 외전이 되며, 동쪽에는 대조전(大造殿) 일곽의 내전이 배치되고 북쪽으로는 후원(後苑)의 경관이 펼쳐진다. 창덕궁(昌德宮)은 그 지형이 넓게 탁 트인 곳이 아니고 후면에 낮은 언덕이 있고 좌우로 평지가 펼쳐지는 곳이다. 따라서 건물의 구성은 이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배치한 것이다. 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이 동남쪽 모서리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지형적인 이유가 있겠으나 예부터 대문에서 내당이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게 하는 배치법이라 할 수 있다. 이 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꺾여 금천교(錦川橋)를 건너게 되는데 이런 다리는 어느 궁에나 있는 것이지만, 이 금천교(錦川橋)는 문에서 주 진행방향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직각으로 꺾여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주변의 배치를 살피면 창덕궁(昌德宮)의 동쪽에는 창경궁(昌慶宮)이 있고 북쪽으로는 창덕궁(昌德宮)과 창경궁(昌慶宮)에서 공동으로 사용된 후원이 있다. 남동쪽으로는 왕실에서 매우 중요시했던 종묘가 있으며 서쪽으로는 정궁인 경복궁(景福宮)이 있다. 사실 창덕궁은 광해군 이후 고종까지 13대에 걸쳐 약 270년 간 정사를 본 궁으로 정궁인 경복궁보다도 오랫동안 왕들이 거처했던 곳이다. 지금의 총 면적은 135.212평에 궁전 건물이 13동, 후원에 28동의 정자와 누각이 남아있다.

놓칠 수 없는 볼거리 왕궁 수문장 교대의식
‘덕수궁 (德壽宮)’

덕수궁은 사적 124호
서울의 중심인 시청 곁에는 아름다운 덕수궁(德壽宮)이 자리하고 있다. 높은 빌딩과 노선버스, 지하철이 복잡한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덕수궁은 '빌딩 숲 사이의 천국'이라 할 정도로 현대인의 숨통을 틔게 해준다. 고풍스런 한국 전통양식의 궁전이 멋스러우며, 탁 트인 공간과 나무들 그리고 시기에 맞춰 펼쳐지는 전시회는 바쁜 현대인의 생활에 청량제 역할을 한다. 약속이 있어 시내에 나왔다가 시간의 여유가 있어 들러보는 넥타이 차림의 직장인, 관광 안내책자를 든 외국인, 웨딩 드레스에 턱시도 차림의 예비 신랑 신부 그리고 이들을 바라보는 다정한 눈빛의 노부부까지 덕수궁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친근한 공간이다. 덕수궁은 원래 세조의 큰손자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저택이었으나 임진왜란 때인 1593년 10월 다른 궁궐들이 화재로 소실되어 의주의 피난길에서 돌아온 선조가 행궁으로 삼아 머물게 되면서 궁의 모습을 갖추어 나갔다. 이때는 이곳을 서궁이라고 불렀다. 그 후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궁명을 경운궁(慶運宮)이라 하였으며, 창덕궁이 완공되어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떠난 뒤에는 인목대비의 거처가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에 의해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는 이곳 즉조당에서 즉위식을 올리고 1647년 창덕궁으로 갈 때까지 궁전으로 사용했다. 그 후 고종에 의해 정식 궁궐로 사용되기까지 270여 년 간 왕가의 별궁 또는 사고로 사용되었다. 1895년 8월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 당한 다음해 2월 고종은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하였다가 8개월만에 이곳으로 돌아왔다. 그 해 10월, 함녕전(咸寧殿)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함과 동시에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고치고 연호를 광무라 했다. 1904년에는 경운궁에 대 화재가 있었고, 다음해에는 여기서 을사보호 조약이 체결되었다. 1907년 7월에는 고종황제가 황태자 순종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는 양위식을 거행했고 순종은 8월에 이곳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같은 해 11월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겨갈 때 고종의 만수무강을 비는 뜻으로 '덕수궁(德壽宮)'이라 이름을 고쳤는데 고종은 1919년 독살 당할 때까지 엄비와 같이 이 곳에서 세월을 보냈다.
어찌보면 우리 역사의 슬프고 안타까운 순간들로 채워진 덕수궁이다. 고종의 애달픈 사연을 지켜보며 같이 아파했을 덕수궁이 경술국치 이후에는 한 때 폐궁으로 방치되었으나 현재는 일반인에게 완전히 개방되어 도심 속, 문화재와 자연이 어우러진 휴식 공간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신랑신부는 이곳에서 미래를 약속하고, 꼬마와 손잡고 온 가족은 아름다운 단청과 새소리에 즐거워하고, 외국인들은 열심히 안내 책자를 들여다본다. 400년 전부터 선조, 광해군, 인조, 고종을 지켜본 눈길로 지금은 우리를 굽어보고 있는 덕수궁, 부드러운 바람과 아름다운 단청, 의젓하게 서 있는 대들보가 한결같은 눈길로 오늘의 우리를 안아준다.

==경복궁==
태조 4년(1395)에 창건된 조선왕조의 법궁(法宮)이다.임진왜란(1592) 당시 왜군에 의해 완전 소실된 뒤 273년간 재건하지 못하였다.
고종 2년(1865) 흥선대원군의 주도하에 재건을 시작해 고종 5년(1868)에 가장 큰 규모로 복원, 다시 법궁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고종 32년(1895)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에 의해 시해당하자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면서 마침내 궁궐로써 기능을 마감한다. 그뒤 일제에 의해 총독부 건물이 들어서는 등 조직적으로 훼손되어 현재는 원래 규모의 약 15%만 남게 되었다.
☞ 궁 궐 개 요
○ 사적 117호
○ 소 재 지 :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1-56
○ 창건시기 : 1395년 (태조 4년)
○ 지정 문화재 현황
- 국보 : 근정전(223호), 경회루(224호)
- 보물 : 자경전(809호), 자경전 십장생굴뚝 (810호), 교태전 아미산굴뚝(811호)
근정문과 행각(812호), 풍기대(847호)
○ 현 면 적 : 126,337 평 (416,990㎡)

==창덕궁==
태종 5년(1405)에 이궁(離宮)으로 짓고 이름을 창덕궁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소실된 것을 광해군 2년(1610)에 중건하여 사용하다가, 인조반정(1623)으로 다시 불에 탔고, 인조 25년(1647) 다시 중건이 시작된 이후 크고 작은 화재와 재건축이 이어졌다. 창덕궁은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때부터 경복궁 재건 전까지 약 270여년간 법궁의 역할을 대신 해 왔다.
1910년 소위 '한일합방'이 인정전에서 체결되었으며, 1917년 내전 일대에 대화재가 발생하자 일제는 이를 복구한다는 핑계로 경복궁 내전 건물들을 모두 헐어다 이곳으로 옮겨 짓게 된다. 또한 역대 왕의 어진을 모신 선원전을 후미진 곳으로 이전하는 등 일제는 의도적으로 창덕궁의 모습을 왜곡했다. 그후 1926년 순종이 대조전에서 승하하자 전각을 헐어 전시장과 각종 편의시설을 마련하여 일반인에게 관람을 허락하였다. 한때 '비원(秘苑)'으로 축소․왜곡되어 불려지기도 했으나, 1990년대 대대적인 복원을 통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조선시대 궁궐의 후원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궁궐로 남아있다.
☞ 창덕궁 개요
○ 사적 122호 ※ UNESCO 세계문화유산
○ 소 재 지 :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1번지
○ 창건시기 : 1405년 (태종 5년)
○ 지정 문화재 현황
- 국보 : 인정전(225호)
- 보물 : 돈화문(383호), 인정문(813호)
선정전(814호), 희정당(815호)
대조전(816호), 구선원전(817호)
○ 현 면 적 : 135,212.1평(446,983㎡)

==창경궁==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세종이 지었던 수강궁 터에 세워진 창경궁은 임진왜란 후 창덕궁과 함께 중건되어 그 쓰임새가 더욱 커진 이궁(離宮)이다.
창경궁은 순조 30년(1830)의 큰 불로 4년 후 복구되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건물들은 대부분 이때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창경궁에서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끊이지 않았는데, 숙종 때 장희빈과 그 일족을 처형한 사건이, 영조 때 사도세자의 죽음 등이 모두 이곳에서 일어났다.
창경궁은 순종 3년(1909) 일제가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고 전각을 헐어 박물관 등을 세운 후 창경원으로 격하시키면서 그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다가, 1983년 창경궁으로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
☞ 궁 궐 개 요
○ 사적 123호
○ 소 재 지 :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2-1
○ 창건시기 : 1484년 (성종 15년)
○ 지정 문화재 현황
- 국보 : 명정전(226호)
- 보물 : 홍화문(384호), 명정문과 행각(385호) 옥천교(386호), 통명전(818)호
풍기대(846호), 관천대(851호)
○ 현 면 적 : 6만5천평 (222,657.9㎡)


==덕수궁==
임진왜란(1592) 이듬해 선조의 시어소(時御所)로 처음 쓰기 시작, 광해군이 즉위한 후 경운궁(慶運宮)이라 이름 지었다.
이후 인조반정(1623)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즉조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한 뒤 창덕궁으로 이어한다.
그뒤 274년간 별궁으로 사용되다가 아관파천(1896) 이후, 이듬해 고종의 환어로 다시 궁궐로 쓰인다. 1904년 큰불로 대부분의 전각이 없어지고, 1905년 중명전에서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한다.
1907년 순종의 즉위와 더불어 궁궐로써 기능을 상실하고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뀐다. 1919년 고종이 함녕전에서 승하한 뒤 일제에 의해 본격적으로 분할, 매각되어 현재는 대한제국 당시의 30% 정도의 규모만 남아 있다.
☞ 궁 궐 개 요
○ 사적 124호
○ 소 재 지 : 서울시 중구 정동 5-1
○ 임어시기 : 1593년 (선조 26년)
※ 궁호 변경 : 경운궁(1611), 덕수궁(1907)
○ 지정 문화재 현황
- 보물 : 중화전과 중화문(819호),
함녕전(820호), 앙부일구(845호)
○ 현 면 적 : 18,635 평 (61,603㎡)

==종묘(宗廟)==
종묘는 조선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제례를 봉행하는 공간이다.
태조의 한양 천도(1394) 후 이듬해 종묘를 지었으며, 세종 3년(1421) 모실 신위가 늘어나자 별묘인 영녕전을 지었다.
현재 정전에는 서측 1실 태조의 신위를 포함, 총 19실 49위의 왕과 왕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또한 영녕전에는 중앙에 태조의 4대조 신위를 포함, 총 16실, 34위의 왕과 왕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역대 왕 가운데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위는 제외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의해 불태워진 뒤 광해군 원년(1608) 재건되어 1836년까지 몇 차례 증축을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전해오고 있다.
☞ 종 묘 개 요
○ 사적 125호 ※ UNESCO 세계문화유산
○ 소 재 지 : 서울시 종로구 훈정동 1번지
○ 창건시기 : 1395년 (태조 4년)
○ 지정 문화재 현황
- 국보 : 정전(227호)
- 보물 : 영녕전(821호)
- 중요무형문화재 : 종묘제례악(1호)
종묘제례(56호)
○ 현 면 적 : 56,570 평 (약 186,000㎡)

★일반적인 최고신에 대한 덕이라는 도덕적 대응과, 조상신에 대한 효라는 도덕적 대응을 구체화시킨 것이 바로 바로 사직(社稷)과 종묘(宗廟)라는 제사 제도이다.
사직을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땅의 신 사(社)와 곡물의 신 직(稷)이 결합된 형태이다. 요컨대 농경의 성공을 비는 제사였던 셈이다. 종묘는 조상들의 위패를 모셔놓고 그에 제사지내는 것, 즉 특정 왕조의 조상신들을 모시는 의례였다. 사직과 종묘라는 제사 체제는 그 자체가 국가 운영 체제이기도 하다. 때문에 '종묘사직'이라는 말이 국가 자체를 뜻하는 말로 사용.

◈근정전과 용

한미수교조약을 맺게 되면서 국기의 필요성이 절박해지자 중국에서 보낸 사신인 마건충(馬建忠)이 그 국기 도안을 이렇게 제안했다.

흰 바탕에 푸른 구름을 아래로 깔고 그 구름 위에 붉은 용을 그려 조선 국기로 삼자는 것이었다. 흰 바탕은 백성을, 푸른 구름은 관원(官員)을, 용은 임금을 나타냄으로써 군․관․민(君官民) 일체의 조화를 표방한 것이라 했다.

이 제안에 조건이 붙었다. 당시 중국 국기에도 용이 그려져 있었는데 이 용과 구별하기 위해 용발톱을 하나 줄여 네 개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굳이 나라의 상징인 국기에 용을 도입하려 한 것이며 용발톱에 차등을 두려 했음은 중국의 속국임을 표방하려는 저의가 드러나 있음을 알겠다.

이에 당시 총리였던 김홍집(金弘集)은 그리기 번잡하다는 핑계로 홍룡(紅龍) 청운(靑雲)을 홍청 태극(太極)으로 수용한 척하고 팔도를 상징하는 팔괘를 더하는 수정을 한다.

용은 천자만이 쓸수 있는 상징물이요 그 아래 왕후(王侯)는 봉황을 상징물로 쓰게 하여 종속관계를 표방해온 지배철학이었다. 임금이 정사를 볼 때 입는 옷을 용포(龍袍)라 하는데 용의 수가 놓여 있게 마련이다.

태종5년 명나라 임금이 태종에게 내린 용포가 그 후대 임금의 격식이 되어 내렸는데 어깨에 용이 걸쳐 있긴 하나 그 용포 등 양편으로 봉황을 세 마리씩 수놓음으로써 속국표시를 소홀하지 않았다. 조선조의 임금들이 입었던 용포에 수놓인 용의 발톱수를 헤아려 보지는 않았지만 다섯개 아닌 네개일 확률이 높다.

새로 단장한 경복궁 근정전 용상이 있는 천장에는 두마리 용이 그려져 있다. 중국 사대(事大)시절에 천자의 독점물인 용을 그려두게 할 턱이 없다. 알아보니 우리나라가 청일전쟁 후 약화된 중국의 기반에서 독립하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후 당시 집무처이던 경복궁 근정전 천장의 봉황 그림을 용 그림으로 바꿔 대한 제국을 표방한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당시 집무를 보지 않던 창덕궁 인정전(仁政殿) 용상 천장그림은 두 마리 봉황으로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근정전의 용과 인정전의 봉황은 한국사의 야누스적 단면을 상징으로 웅변하는 것이 된다. 다만 그 사대 상징인 봉황을 아직도 대통령 상징문양으로 널리 쓰고 있다는 것을 되돌아보게 하는 역사 해프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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