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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諡號)란 무엇이며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
중국 봉건제도의 특징은 엄격한 신분구별에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의 안정을 기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임금과 신하, 양반과 평민, 어른과 아이, 부모와 자식, 부부는 물론이고 남자와 여자, 심지어는 적서(嫡庶)까지 분명하게 구별해 놓고는 복종을 강요했다. 우리의 양반계층이나 상민계층도 이로부터 영향받은 바 크다.
자연히 생활양식은 물론 심지어는 계층간에 사용되는 언어나 용어에도 차별이 있었다. 예를 들어보자. 다같은죽음이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은 천차만별이었다. 즉 천자는 붕(崩:무너질 붕), 제후(諸侯)는 훙(薨:죽을, 무너질 훙), 고관이나 선비는 졸(卒)이 되나 평민들은 사(死)라고 표현했다. 물론 역적(逆賊)이 죽는 것은 폐(斃:넘어질 폐)라고 했다. 일종의 개죽음을 뜻한다.
또한 칭호에서도 특이한 제도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름은 태어나면서 짓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과거 봉건시대에는 일부 계층에 한해 죽어서도 이름이 붙는 경우가 있었다. 이른바 諡(시호시)號(부르짖을 호)라는 것이다. 대체로 왕이나 왕비, 왕족, 고관대작(高官大爵)이 죽으면 생전의 업적(業績)을 가려 일정한 칭호를 내렸다. 그것을 증시(贈諡), 죽고 나서 한참 뒤에 내리면 추시(追諡), 諡號를 바꾸는 것을 개시(改諡)라고 했다.
이 밖에도 명망있는 학자의 경우, 친구나 가족들이 諡號를 결정하기도 했는데 그것을 사시(私諡)라고 했다. 帝王의 경우에는 禮官의 품주(稟:줄 품. 奏:아뢸 주)에 따라 계위한 제왕이 윤허(允許)함으로써 결정되는데 크게 표양(表揚 文과 武)과 비판(批判 靈,煬,悼 등), 동정(同情 哀,愍)의 경우가 있었다.
또 高官은 朝廷에서 결정해 내렸다. 조선시대의 경우,정2품 이상으로 국한했는데 후손들이 선정한 고인의 행장(行狀)을 예조(禮曹)에 제출하면 봉상시(奉常寺)와 弘文館에 보내 결정했다. 대체로 생전의 업적에 따라 文, 武, 貞, 正, 恭, 忠, 良, 익(翼), 정(靖)과 같은 좋은 의미의 글자 2~3자를 사용했다. 참고로 이순신(李舜臣) 장군은 忠武, 을사조약에 반대해 자결한 민영환(閔泳煥)선생은 忠正, 퇴계(退溪)선생의 諡號는 문순(文純)이다.
중국 주(周)나라 때부터 시행된 본 제도는 우리나라의 경우, 신라 法興王 1년(514)에 智證 사후智證이라는 諡號를 내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마도 최초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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