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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왕(否王)
※ 본문설명
생몰년 미상. 기자조선의 왕. 준왕(準王)의 아버지이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위략 魏略》을 인용한 부왕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옛날 기자(箕子)의 후손 조선후(朝鮮侯)가 중국의 주(周)나라가 쇠약해짐을 보고 스스로 왕을 칭하고 연(燕)나라와 대치하였다.
그뒤에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의 침입을 받아 서쪽의 많은 땅을 상실하고 점차 약해졌다. 드디어 진(秦)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만리장성을 쌓았을 때 부왕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진나라의 공격을 받을까 두려워 진나라에 복속되었지만 조회(朝會)를 하지 않다가 죽었다. 뒤를 이어 아들 준이 왕위에 올랐다.
※ 참고 : 三國志. 〈申瀅植〉
※ 내용출처 : 네이버 지식 IN
※ 이미지출처 : 김산호 고조선의 단군시대 47대 단군
준왕(準王)
※ 본문설명
고조선의 왕으로 부왕(否王)의 아들이다. 준왕은 중국의 진(秦)나라 말기와 한(漢)나라 초기에 걸치는 시대에 재위(在位)하였다. BC 206년 중국의 통일제국 진(秦)이 멸망하고 혼란이 계속되다가 한(漢)에 의해 다시 통일이 이루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유이민이 파상적으로 랴오둥[療東]과 한반도에 유입되었다. 한(漢)이 중국을 통일한 뒤 건국과정에 적극 참여했던 노관(盧)은 이성(異姓) 제후 7명의 한 사람으로 연왕(燕王)에 봉해졌다. 그러나 곧 이성 제후에 대한 정치적 압박이 가해지면서 노관은 흉노(匈奴)로 망명했고, 연나라 지역은 한군(漢軍)에 의해 점령되어 혼란이 초래되었다. 이때 연나라의 부장이었던 위만(衛滿)은 자신이 거느리던 무리 1,000여 명을 이끌고 고조선에 망명했다. 그 시기는 BC 3세기말에서 2세기초로 추정된다.
위만(衛滿)은 고조선의 준왕(準王)에게 번병(藩屛)이 되기를 청하여 고조선의 서쪽 변경을 수비하는 일을 맡았고, 준왕의 신임을 얻어서 박사(博士)에 임명되었으며 100리의 땅을 받는 한편, 규[圭:천자가 제후에게 주는 상원하방(上圓下方; 위는 둥글고 아래는 네모난)의 옥(玉)]도 하사받았다.
그뒤 위만(衛滿)이 준왕을 몰아내려 하였다. 당시 고조선 사회는 철기문화가 전해져 생산력 수준이 향상되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와의 대립이 꽤 진행되고 있었고 조정안에는 실력자들 사이에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위만(衛滿)은 자신의 세력이 커졌음을 믿고 준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한(漢)의 군사가 쳐들어오니 왕을 보호할 수 있게 해달라고 거짓 보고를 올렸다. 준왕은 이를 의심하지 않고 위만을 부르니 위만은 군사를 이끌고 와서 준왕을 쫓아 버리고 자신이 왕이 되었다(BC 194). 준왕은 바다로 달아나 진국(辰國)을 점령하고 한왕(韓王)이 되었다.
한편,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記)》·〈고려사〉·〈세종실록〉지리지·〈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에서는 그가 정착한 지역을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으로 비정했으나, 충청남도 직산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3세기 무렵에는 그 후손이 끊어졌으나 삼한 지역에서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같은 책에 인용된 위략(魏略)에는 준왕의 아들과 친척 중 고조선에 남은 사람들은 한씨(韓氏) 성을 칭했고, 준왕은 한왕이 되었으나 고조선과 왕래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 참고 : 두산대백과사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 내용출처 : 차석찬의 역사창고
※ 이미지출처 : 이경찬의 역사교실
위만(衛滿 )
※ 본문설명
고조선의 왕으로서 재위 B.C.194~?이다. 그에 대한 기록은 사마천의 《사기(史記)》와 반고의 《한서(漢書)》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위만은 B.C.206년 중국 한(漢)나라 고조(高祖; BC 247 ?~BC 195)는 중국을 통일한 후 무직의 무뢰배였고 한 고조의 절친한 친구였던 노관(盧)에게 이성(異姓) 제후 7명[초왕(楚王) 한신(韓信), 회남왕 경포, 양왕 팽월, 연왕 노관, 장사왕 오신(吳臣), 민월왕 무저, 남월왕 조타]의 한 사람으로 연왕(燕王)에 봉했다. 그러나 곧 이성 제후에 대한 정치적 압박이 가해지면서 노관은 흉노(匈奴)로 망명했고, 이때 연왕의 부장으로 있던 위만은 연의 망명자 1천여 명을 이끌고 패수(浿水)를 건너와 고조선의 준왕(準王)에게 거두어 줄 것을 요청했다. 그 뒤 준왕의 신임을 얻어 준왕의 신임을 얻어서 박사(博士)에 임명되었으며 100리의 땅을 받는 한편, 규[圭:천자가 제후에게 주는 상원하방(上圓下方; 위는 둥글고 아래는 네모난)의 옥(玉)]도 하사받았다. 그리하여 서쪽 변방을 지키게 되었는데 위만은 점차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의 오랑캐 및 옛 연·제 지역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자기 세력을 키웠다. 마침내 위만은 준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거짓으로 한(漢)나라의 병사가 십도로 쳐들어오니 들어가 왕을 호위하겠다고 하고는 갑자기 군사를 몰아 준왕(準王)을 쳐서 왕위를 빼앗고 도읍을 왕검성(王儉城)에 정했다.
위만은 준왕(準王) 때의 통치체제를 그대로 이어받아 나라 이름을 그대로 조선이라 불렀다. 이때를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는 효혜고후시(孝惠高后時:B.C.194~B.C.180)라고 하였다. 즉, 위만조선이 성립한 시기는 한(漢)나라 고조(高祖; BC 247 ?~BC 195)의 아들인 효혜제(孝惠帝;이름은 영; B.C. 195 ∼188)와 고조의 부인이며 효혜제의 어머니인 고후(高后)[여태후(呂太后)로서 이름은 여치(呂雉;기원전241~180 )]가 정치를 하던 시기를 말한다.
위만이 나라를 세울 무렵 한나라는 건국 초기여서 국가적인 체계가 제대로 서지 못했고, 흉노(匈奴)의 계속적인 위협을 견제해야 했으므로 조선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정책을 폈다. 위만은 한(漢)으로부터 병력과 물자를 원조받아 세력을 신장시키면서 흉노족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또 이웃의 작은 마을과 진번(眞番), 임둔(臨屯) 등을 아울러 복속하여 수천리에 달하는 지역을 다스리게 되고 주위의 여러 씨족사회를 통합하여 갈등을 줄이고 정치의 안정을 도모했다. 위만은 강력한 국가를 형성, 손자 우거왕(右渠王)에 이르기까지 고조선 역사상 가장 융성했던 나라로 꼽힌다.
위만의 출신에 대해 중국 문헌은 모두 '연나라 사람'(燕人)이라 기록했다. 그러나 그가 망명할 때 '상투를 틀고 오랑캐의 복장'을 한 점을 들어 연나라 지역에 살던 고조선 계통의 인물로 보기도 한다. 머리카락을 틀어올리는 풍습은 동이족 이외에 다른 이민족에게도 있었던 것이며, '오랑캐의 옷'[蠻夷服]이라는 것도 막연히 중국인의 복장이 아니었음을 말할 뿐이므로 명확히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가 고조선의 왕위를 차지한 뒤 나라 이름을 계속 '조선'이라 했고, 고조선이나 진번 주민의 지지를 받았던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위만의 집권을 고조선 내에서의 단순한 정권교체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 참고 : 두산대백과사전
※ 내용출처 : 차석찬의 역사창고
※ 이미지출처 : 네이버포토앨범/hanmom님
우거왕(右渠王 )
※ 본문설명
고조선의 마지막 왕으로서 위만(衛滿)의 손자이다. 우거왕이 집권할 당시는 한나라 무제(武帝;BC 156~BC 87)가 강력한 대외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당시 한 무제는 북서쪽으로 서역과 흉노를 격파하고, 남쪽으로 귀주지역과 남월지역(현재의 베트남)을 정복하였다. 하지만 고조선대로 주변 나라들과 중국의 중간에서 중계무역으로 경제적 이익을 톡톡히 챙기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마찰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중국과의 화평관계는 잠시뿐, 위만(衛滿)의 손자 우거왕 때 양국의 관계는 급속히 냉각되었다.
한(漢)은 고조선을 약화시킬 속셈으로 BC 128년에 만주 요동지역에 있던 예맥(濊貊) 족장 남려(南閭)를 교사하여 우거왕에게 반기를 들도록 하였다. 남려는 요동태수의 후원을 받아 폭동을 일으켰으며 조선 왕 우거(右渠)와의 관계를 끊고 그가 지배하던 28만의 인구와 함께 한나라에의 내속(內屬)을 청하자 한(漢)은 곧바로 그 지역에 창해군(滄海郡: 창해군은 무역의 전진기지 정도로만 역할을 하다가 2년 후에 폐지 되었다)을 설치하였다.
우거왕은 이 사태를 주목하여 중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주변나라 사신들이 고조선을 통과하여 중국에 입국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중국의 유민들을 대거 받아들여 중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다.
한은 전쟁의 빌미를 찾았다. 한나라 무제(武帝)는 BC 109년 섭하(涉河)를 사신으로 고조선에 보내 전쟁의 꼬투리를 만들도록 하였다. 섭하는 돌아오는 길에 그를 수행한 고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을 패수에서 살해하였다. 이 공으로 섭하(涉河)는 요동군 동부도위(遼東郡 東部都尉)로 임명되었는데, 고조선 또한 물러서지 않고 군사를 몰아 섭하를 죽이고 요동군을 짓밟았다.
한나라 무제(武帝;BC 156~BC 87)는 기다렸다는 듯이 흉노(匈奴)와 남월족을 복속시킨 다음 예봉(銳鋒; 날카로운 기세를 말함)을 고조선 침공에 돌렸다. 육군은 좌장군(左將軍) 순체(荀)의 지휘 아래 고조선의 서쪽에서 공격하였고, 수군은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의 지휘 아래 발해만을 건너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을 포위하였다. 대제국인 한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고조선은 긴장하였다. 그러나 고조선은 우거왕이 직접 지휘하는 가운데 오히려 기선을 제압하여 한의 수륙 양군을 격퇴시켰다.
고조선의 강력한 반격에 당황한 한나라 무제(武帝)는 위산(衛山)을 사신으로 보내 휴전협상을 시도하였다. 우거왕은 태자를 보내어 협상의 뜻이 있음을 밝혔으나 위산은 태자에게 항복할 것을 강요하였다. 태자는 협상이 진행될 수 없음을 알고 돌아옴으로써 휴전협상은 깨지고 말았다.
이후 한의 수륙 양군은 다시 왕검성까지 진격하여 공격하였으나 고조선의 완강한 저항에 밀려 전쟁은 지리한 소강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이러한 소강상태는 한과 고조선에게 모두 불리하였는데, 특히 고조선의 왕검성 안에서는 주전론자와 화전론자가 대립하여 전의를 반감시키고 있었다. 이러던 중 주전론자에 밀린 화전론자(朝鮮相 노인(路人), 상(相) 한음(韓陰), 니계상 삼(尼谿相 參) 그리고 장군 왕협(王) 등은 고조선을 등지고, BC 108년 주화파(主和派) 니계상(尼谿相)삼(參)이 보낸 자객에게 우거왕이 살해되었다
그러나 왕검성의 수비는 왕의 측근인 성기(成己)가 맡아 한의 군사들을 막아내었다. 그러자 점점 초조해진 한의 진중에서는 투항해온 화전론자 중 노인의 아들 노최(路最)로 하여금 성안의 주민을 이간시켜 우거왕의 아들 장(長)과 함께 성기를 모살하고 왕검성을 함락시켜 위만조선을 멸망시켰다.
이리하여 고조선 지휘부의 이탈과 배반으로 왕검성은 함락되었고, 단군 왕검(檀君王儉)이 개국한 고조선은 한과의 전쟁을 끝으로 패망하고 말았다. 이때가 BC 108년이었다.
※ 보충설명
아래의 내용은 사마천의 《사기(史記)》조선전(朝鮮傳)에 나오는 위만조선 멸망과 관련이 있는 문구입니다. 참고하세요.
傳子至孫右渠 所誘漢亡人滋多 又未嘗入見 眞番旁眾國欲上書見天子 又擁閼不通 元封二年 漢使涉河譙諭 右渠終不肯奉詔 何去至界上 臨浿水 使御刺殺送何者 朝鮮裨王長 即渡 馳入塞 遂歸報天子曰 殺朝鮮將 上爲其名美 即不詰 拜何爲遼東東部都尉 朝鮮怨何 發兵襲攻殺何 」
天子募罪人擊朝鮮 其秋 遣樓船將軍楊僕從齊浮勃海 兵五萬人 左將軍荀彘出遼東 討右渠 右渠發兵距險 左將軍卒正多率遼東兵先縱 敗散 多還走 坐法斬 樓船將軍將齊兵七千人先至王險 右渠城守 窺知樓船軍少 即出城擊樓船 樓船軍敗散走 將軍楊僕失其眾 遁山中十餘日 稍求收散卒 復聚 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 未能破自前」
天子爲兩將未有利 及使衛山因兵威往諭右渠 右渠見使者頓首謝 願 降 恐兩將詐殺臣 今見信節 請服降 遣太子入謝 獻馬五千匹 及饋軍糧 人眾萬餘 持兵 方渡浿水 使者及左將軍疑其爲變 謂太子 已服降 宜命人毋持兵 太子亦疑使子左將軍詐殺之 遂不渡浿水 復引歸 山還報天子 天子誅山 左將軍破浿水上軍 乃前 至城下 圍其西北 樓船亦往會 居城南 右渠遂堅守城 數月未能下 左將軍素侍中 幸 將燕代卒 悍 乘勝 軍多驕 樓船將齊卒 入海 固已多敗亡 其先與右渠戰 困辱亡卒 卒皆恐 將心慚 其圍右渠 常持和節 左將軍急擊之 朝鮮大臣 乃陰閒使人私約降樓船 往來言 尙未肯決 左將軍數與樓船期戰 樓船欲急就其約 不會 左將軍亦使人 求閒 郤降下朝鮮 朝鮮不肯 心附樓船 以故兩將不相能 左將軍心意樓船前有失軍罪 今與朝鮮私善而又不降 疑其有反計 未敢發」
天子曰將卒不能 前使衛山諭降右渠 右渠遣太子 山使不能剸決 與左將軍計相誤 卒沮約 今兩將圍城 又乖異 以故久不決 使濟南太守公孫遂往(征)(正)之 有便宜得以從事 遂至 左將軍曰 朝鮮當下久矣 不下者有狀 言樓船數期不會 具以素所意告遂 曰 '今如此不取 恐爲大害 非獨樓船 又且與朝鮮共滅吾軍' 遂亦以爲然 而以節召樓船將軍 入左將軍營計事 即命左將軍麾下執捕樓船將軍 并其軍 以報天子 天子誅遂 左將軍已并兩軍 即急擊朝鮮 朝鮮相路人 相韓陰 尼谿相參 將軍王唊 相與謀曰 '始欲降樓船 樓船今執 獨左將軍并將 戰益急 恐不能與 戰 王又不肯降' 陰 唊 路人 皆亡降漢 路人道死 元封三年夏 尼谿相參乃使人殺朝鮮王右渠來降 王險城未下 故右渠之大臣成己又反 復攻吏 左將軍使右渠子長降 相路人之子最 告諭其民 誅成己 以故遂定朝鮮 爲四郡 封參爲(澅淸侯 陰爲荻苴侯 唊爲平州侯 長(降)爲幾侯 最以父死頗有功 爲溫陽侯 左將軍徵至 坐爭功相嫉,乖計 棄市 樓船將軍亦坐兵至洌口 當待左將軍 擅先縱 失亡多 當誅 贖爲庶人」
※ 참고 : 두산대백과사전
※ 내용출처 : 차석찬의 역사창고
※ 이미지출처 : http://www.margosung.com
※주의 : 이미지는 꼭 우거왕이 아니고, 단군의 이미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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