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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5/11/26
 

고려의 외침 극복

거란의 침입
고려의 북진정책 및 친송정책과 정안국에 위협을 느낀 거란이 993년(성종 12년), l010년, 1018년(현종 9년)의 3차에 걸쳐 고려에 침입한 사건을 말한다.

고려 건국 당시, 지금의 몽골과 만주지방에는 거란족과 여진족이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중 거란족은 야율아보기가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916년(발해 애왕 16년) 요나라를 건국하였다.
926년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려와 국경을 접하게 되자 고려 태조는 북진정책을 추진, 발해 유민을 포섭하였다. 거란은 고구려 장수왕 때 출복부 등 일부가 예속되었지만 고려와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 922년(태조 5년) 야율아보기가 낙타와 말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발해를 멸망시키자 고려는 이들과 적대관계를 유지하였고, 942년 태종이 낙타 50필을 보내자 사신은 섬으로 유배보내고 낙타는 만부교에서 굶겨 죽여버렸다. 이는 북진정책의 일환으로 취해진 것으로 그 뒤에도 계승되어 정종 때 광군 30만을 조직한 것도 요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귀주대첩

고려시대 현종 때 거란 침략군을 구주에서 강감찬의 지략과 고려인의 용맹성으로 물리쳐 승리한 싸움이다.

고려는 태조 때부터 발해를 멸망시키고 압력을 가해오는 거란에 대해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북진정책을 계속 시행하였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993년(성종 12년) 소손녕에 의한 거란의 제1차 침략이 있었으나 서희의 담판으로 압록강 동쪽의 땅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강동 6주가 군사적 거점이 되자 이를 차지할 목적으로 거란은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1010년(현종 1년) 성종이 제 2차 침략을 시도하여 개경까지 함락했으나 별다른 소득없이 다시 철수하였고, 이에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18년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제3차 침략을 감행해왔다.

이때 고려는 강감찬을 상원수,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8천의 대군으로 맞서 싸우게 하였다. 거란군은 흥화진을 통하여 내려오다가 그 곳에서 패배하고 자주에서도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서경을 거쳐 개경 부근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병력의 손실이 크자 소배압은 정벌을 포기하고 황해 신은에서 회군하여 가다가 청천강 유역의 연주․위주에서 강감찬의 공격을 받아 패하여 달아났으며, 특히 귀주에서 기다리고 있던 병마판관 김종현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배하였다.

이때 살아남은 병력이 수천 명에 불과하였을 정도로 거란의 패배는 심각하였고, 그 결과 거란은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다시는 요구할 수 없게 되었다.





여진정벌


여진정벌의 배경은 새로 일어나는 동여진 완안부족은 더욱 성장하여 그 부족장 영가에 이어 1103년(숙종 8년) 에 우야소가 그뒤를 이었을 때에는 그 세력이 함흥부근까지 들어와 주둔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고려군과 우야소의 여진군은 충돌 직전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완안부의 기병이 정주관밖에 쳐들어오게 되었다.

왕은 무력으로 여진정벌을 결심하고 문하시랑평장사 임간을 시켜 이를 평정하게 하였으나 여진군에게 크게 패하였다. 이때에 윤관은 왕명을 받고 여진에 대한 북벌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해 2월 21일 당시 추밀원사로 있던 그는 동북면행영병마도통이 되어 3월에 여진과 싸웠으나 고려군은 여진의 강한 기병에 부딪혀 그 태반이 죽고 적진에 함몰되는 패전을 당하였다. 이에 임기응변으로 화약을 맺고 일단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패전의 원인은 적의 기병을 우리의 보병으로는 능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고 왕에게 보고하고, 전투력의 증강과 기병의 조련을 진언하여 윤관은 1104년(숙종 9년)12월부터 여진토벌을 위한 준비확장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결과 별무반이라고 하는 특수부대의 창설을 보게 되었다. 1107년 여진족의 동태가 심상하지 않다는 한 변장의 긴급보고를 접하자 원수가 되어 부원수인 지추밀원사 오연총과 17만대군을 이끌고 정주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한편, 여진추장에게 거짓통보를 하여 고려가 앞서 잡아둔 허정․나불 등을 돌려보낸다고 하자 여진족 400여명을 보내왔는데, 이때 이들을 유인하여 거의 섬멸시키고 사로잡았다.

5만 3000명을 거느리고 정주에 도착한 뒤 중군은 김한충, 좌군은 문관, 우군은 김덕진으로 하여금 군사를 지휘하게 하였으며, 수군은 선병별감 양유송 등이 2, 600명으로 도린포의 바다로부터 공격하였다.

막강한 고려군의 위세에 눌린 여진이 동음성으로 숨자 정예부대를 동원해서 이를 격파하였으며, 여진군이 숨은 석성은 척준경을 시켜 패주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태반을 섬멸하였다.
적의 전략적인 거점을 무찌른 곳은 135개처, 적의 전사자 4, 940명, 생포 130명의 빛나는 전과를 거두었다. 조정에 전승의 보고를 올리고 탈환한 각지에 장수를 보내 국토를 획정하고 9성을 축조하였다.

그리고 남쪽으로부터 백성을 이주시켜 남도지방의 이주민들이 이곳을 개척하여 살게 되었다. 새로 성을 구축한 곳은 함주에 이주민 1, 948가구, 영주에 성곽 950칸과 이주민 1, 238가구, 웅주에 성곽 992칸과 이주민 1, 436가구, 복주에 성곽 774칸과 이주민 680가구, 길주에 성곽 670칸, 이주민 680가구, 공험진에 이주민 532가구로서, 이 6성 외에 이듬해에는 숭녕․통태․진양의 3성을 더 쌓아 이른바 윤관의 9성 설치가 완결되었다.

특히 함흥평야의 함주에 대도독부를 두어 이곳이 가장 요충이 되었다. 고려군이 이렇게 함경도일대를 석권하게 되자 그곳을 근거지로 웅거하던 완안부의 우야소가 반발하여 1108년초에 군사를 이끌고 정면으로 대결하게 되었다.

가한촌의 전투에서 포위당하였으나 척준경 등의 역전으로 겨우 구출되었으며, 영주성의 공방전에서는 역시 척준경의 용맹과 기지로써 여진군을 겨우 물리치게 되었다. 또 다시 여진군 수만명이 웅주성을 포위하자 역시 척준경의 지략과 용기로써 적을 패주시켰다. 그해 3월 30일 포로 346명, 말 96필, 소 300두를 노획하여 개경으로 개선하여 '추충좌리평융 척지진국공신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지군국중사'에 봉하여졌다.

서쪽에 강력한 요나라와 접경하고 있던 여진은 고려와 평화를 회복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게 되었으나, 윤관의 9성축조와 농업이주민으로 말미암아 농경지를 빼앗긴 토착여진족으로서는 강력히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여진족은 길이 배반하지 않고 조공을 바친다는 조건아래 평화적으로 성을 돌려주기를 원하였다. 드디어 여진은 적극적인 강화교섭을 개시하였으며 예종은 육부를 소집하고 9성환부를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평장사 최홍사 등 28명은 찬성하고 예부낭중 한상은 반대하였으나 당시 조정은 화평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 이유는 여진을 공략함에 있어 당초에 한 통로만 막으면 여진의 침입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고려의 예측이 맞지 않았고, 근거를 잃은 여진족의 보복이 두려웠으며, 개척한 땅이 너무 넓고 거리가 멀어 안전을 기할 수 없다는 점, 무리한 군사동원으로 백성의 원망이 일어나리라는 점 등이었다.

그리하여 다음해 7월 3일 회의를 열고 9성환부를 결의하여 7월 18일부터 9성 철수가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윤관이 장병들과 더불어 생명을 걸고 경략하였던 9성일대의 땅이 다시 여진에게 환부되었다.
뒤에 아골타가 금나라를 세워 강대한 국가가 된 데에는 그들이 9성을 다시 찾은 데 그 원인이 있었다고 본다.





몽고와의 전쟁


최씨정권이 확립되었을 때 고려는 밖으로부터 몽고의 압박을 받아 커다란 시련을 겪게 되었다.
13세기에 들어와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에는 일대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으니, 그것은 몽고세력의 흥기였다. 몽고고원의 유목민족인 몽고족은 금의 세력하에 있었는데, 13세기 초엽에 테무친이라는 영웅이 나타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1206년에는 칸(황제)의 지위에 올랐으니, 이가 곧 칭기즈칸이다.

이 때부터 몽고는 사방으로 정복사업을 전개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북중국에 자리잡은 금을 침략하여 그 세력이 강성해지더니 마침내 고려와도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고려가 몽고와 처음으로 접촉을 갖게 된 것은 고종 6년인 1219년에 강동성의 거란족을 몽고와 함께 공략하면서부터이다.

요가 멸망한 후 거란족은 금에 복속하여 있다가 금이 쇠약해지자 독립하였지만 이번에는 몽고에 쫓기어 고려영토로 밀려와 고려군의 공격을 받고 강동성에 갇혀 있었는데, 이것을 고려와 몽고가 협공하여 패멸시켰던 것이다. 몽고는 거란을 토벌한 후 고려에 대하여 큰 은혜나 베푼듯이 과대한 공물을 요구하였는데, 특히 1221년에 사신으로 온 저고여는 몽고 황태자의 지시라 하여 과중한 공물을 요구할 뿐 아니라 그 태도가 오만불손하여 고려 군신들의 불만을 샀다.

그러던 저고여가 1225년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압록강 부근에서 누구인가에 의하여 피살된 사건이 일어나자 몽고는 이를 트집잡아 고려에 침입하기에 이르렀다. 몽고의 제 1차 침입은 1231년에 시작되었다. 몽고의 장군 살리타가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북계의 여러 성을 함락시키고 개경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고려는 몽고군의 침입을 맞아 귀주에서 박서가 용감히 항전하였으나 수도가 포위되자 화의를 청하게 되었고, 이에 몽고군은 서북면에 다루가치를 설치한 후 철수하였다.

그러나 몽고가 고려에 대하여 더욱 무리한 조공을 요구하고 고려에 파견된 몽고관리의 횡포가 심하여 고려 군신의 분노가 고조되자 최우정권은 단호히 항전할 것을 결의하고 1232년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항몽태도를 분명히 하였다.

이에 몽고는 제 2차 침입을 단행하여 개경을 지나 한강 남쪽까지 공략하였으나 살리타가 처인성에서 김준후에게 사살되어 철군하였다. 그 뒤에도 몽고군은 계속해서 1259년인 고종 46년 강화가 맺어질 때까지 여러 차례 침입하였다.

이렇게 오랫동안에 걸쳐 몽고군의 침략이 되풀이 되었지만 고려인은 끈질긴 항쟁을 계속하여 국토를 수호하였다. 강력한 반몽정책을 견지한 최씨정권이 바다 건너 강화도에서 꿋꿋이 항전을 지휘하였고, 육지에서는 일반 민중들이 침략군에 대항하여 용감히 싸움으로써 몽고군을 격퇴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무신정권은 농민들로 하여금 산성과 해도로 입보케 하는 정책을 썼으므로 이들 농민은 이 기지를 중심으로 집단적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싸워 항전의 주체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항몽전에 변화를 초래한 커다란 사건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항전을 고수해 왔던 최씨정권의 붕괴였다.
1258년 최의가 문신 유경, 무신 김인후 등에 의하여 제거되자 강화파 문신들의 주장에 따라 이듬해 몽고와의 화의가 성립된 것이다. 그러나 최씨정권을 무너뜨린 무신 김준이 유경을 거세한 후 스스로 교정별감이 되어 무신정치를 계속하고 몽고와의 강화를 반대하였는데, 이는 원종 9년인 1268년 김준을 살해하고 교정별감이 된 임연에 이르러 더욱 노골화되었다. 임연은 친몽정책을 쓴 원종을 폐하고 왕제 안록공 창을 세웠으나 1269년 몽고의 압력으로 곧 복귀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임연이 죽은 후 그 아들 임유무도 반몽정책을 고수하여 1270년 국왕이 몽고의 세력을 업고 몽고에서 귀국하면서 강화도에서 출륙하여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명하였는데, 그는 이를 거부하고 재항쟁을 결의하였으나 반대파에 의하여 피살됨으로써 무신정권은 종식되고, 이에 따라 오랜 항몽도 끝나게 되었다. 이제 고려는 왕정을 복구하고 개경으로 환도하였지만 아직 몽고에 대한 반항이 그친 것은 아니었다.
무신정권의 무력기반으로 항몽전의 선두에 섰던 삼별초가 개경환도를 반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즉, 1270년 출륙명령이 내리자 개경환도는 곧 몽고에 대한 항복을 의미한다하여 배중손이 이끈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승화후 온을 왕으로 옹립하고 몽고세력을 등에 업은 원조의 개경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장기전을 펴기 위해서 멀리 진도로 내려가 남부지방 일대를 지배하에 넣었지만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의 토벌로 진도가 함락되자 그 일부는 김통정의 지휘하에 다시 제주도로 옮겨 항쟁을 계속하다가 1273년에 결국 진압되고 말았다.

이 때 삼별초군은 중앙으로 가는 조선을 붙잡아 세미와 공물을 탈취하고 남부의 넓은 지방을 점령하여 몽고군을 습격하였으며, 한 때 일본에 협력을 요구하는 외교문서를 보내기도 하였으나 몽고군과 정부군의 합동공격으로 좌절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오랫동안 계속된 대몽항쟁도 종식되고 이후 고려는 몽고의 간섭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삼별초의 항쟁

1258년 3월 고려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나 최의를 타도함으러써 4대 63년에 걸친 최씨정권을 종식시켰다.

그러나 아직 무신들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대몽강경론은 수그러들지 않았으며, 태자가 몽고로 입조하는 것을 반대하며 끝까지 항쟁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다시 몽고의 침입을 유발하여 1258년 4월 몽고군이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이번에 몽고군은 서 북 지방을 거쳐 경기, 황해, 충청 지방을 제압할 뿐만 아니라 동북 지방으로 남진하여 1259년에는 인제 방면까지 진출하였다.
피해는 극심하였고 일부 지방에서는 백성들이 오랜 전쟁에 염증을 느 낀 끝에 지방관을 죽이고 몽고군에 항복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몽고군은 강화도 건너편 경기 지방에 공격을 집중하여 이 지역을 완전히 초토화하고 강화를 고립시키자, 고려는 드디어 1259년 3월 태자의 직접 조공을 조건으로 한 휴전에 합의하였다.

1259년 4월 약속대로 태자 이 몽고로 출발하였다. 6월, 고려에서는 재위기간의 대부분을 몽고와의 전쟁으로 보낸 고종이 세상을 떠나고 7월에는 몽고 황제 헌종도 병사하였다. 고려와 몽고의 새로운 계승자인 전과 쿠빌라이가 개봉에서 만났고, 양국 간의 전쟁은 이로써 종식되었다.

몽고로부터 돌아온 세자 전은 1260년 3월 왕위에 오르니 이 사람이 원종이다. 어쨌든 기나긴 전쟁이 끝나고 강화가 성립되자, 이를 실질적으로 성사시킨 국왕 원종과 문신관 료들의 입지가 강화되었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무신 세력이 도태된 것은 아니었다. 강화도에서는 무신 김준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국왕을 배제하고 개경 환도를 늦추면서 세력기반을 확충하려 하였다.

이에 몽고는 개경 환도를 재촉하면서 김준을 소환하는 등 압박을 가하였다. 강화 이후 위축 되던 무신들은 몽고와의 재대결을 주장하는 강경론이 대두되었고, 임연이 김준을 죽이고 집권한 뒤 원종을 폐위하고 몽고와 의 재대결을 기도하였다. 이에 원종은 몽고에 원군을 청하였고, 강화 도에서 문신관료들이 임연의 아들인 임유무를 제거함으로써 1270년 무신들의 정권은 완전히 종식 되었다.

그러나 모든 고려인이 여기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는 조정에서 강화 도를 완전히 포기하고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경정하자, 이를 몽고에 대한 항복과 종속으로 받아 들이고 강력히 반발하였다. 이들은 원종의 해산명령을 무시하고 몽고군과 굴욕적인 유전에 반대 하며 강화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삼별초는 원래 최우가 수도의 치안유지를 위해 창설한 야별초로부터 시작하였다.

야별초는 지방에도 파견되면서 점차 그 수가 늘어나 좌․우별초로 나뉘었고, 몽고와의 항전기간 동안에는 몽고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해온 장정들로 신의군을 조직하면서 삼별초가 되었다.
최씨정권을 자신들의 정권유지를 위해 사적으로 양성한 군대가 있었음에도 불 가하고 국가의 공병조직을 자신들의 통제하에 둘 필요를 느꼈다.

따라서 자기 가문의 사병들과 별도로 국고에 의해 운영되는 공병으로서 삼별초를 육성하여 정권의 무력기반으로 활용하였다. 하지만 삼별초가 무신정권의 수족으로서만 가능하였던 것은 아니다. 고려의 대몽항쟁 기간 중 그래도 국가의 공병으로 몽고군과 교전을 벌인 집단이 바로 이 삼별초이다.
삼별초는 백성들이 농성 중인 산성이나 섬 방어별갑과 함께 수십 명 또는 수백 명이 파견되어 함께 싸우기도 하고, 때로 유격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몽고군에 대항해 함께 싸운 경험은 훗날 삼별초의 항쟁 에 농민들이 적극 호응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1270년 6월 배중손과 노영희 등은 승화후 온을 옹립하고 강화에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 것을 순수한 민족정신에 바탕을 둔 것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삼별초의 반란을 촉발시킨 직접적인 원인은 원종이 삼별초의 해체를 명한 데 있었으며 삼별초가 무신정권의 직접적인 물리력으로 활용되었던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삼별초 항쟁은 부분적으로 배제되어 가는 무신정권의 잔여 세력들이 왕권강화와 친정체제 구축을 시도하는 원종에 도전하는 것으로 볼 여지도 있다. 그러나 원종의 이런 정치적 움직임은 몽고의 후원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따라서 그 반대편에서 움직인 삼별초는 자연히 반몽적인 민족 항쟁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6월 3일 강화도의 삼별초군은 1천여 척의 함선을 타고 진도로 이동하였다. 8월 19일 진도에 도착한 삼별초군은 전라도와 경상도 일원을 제압하였고 제주도까지 장악하였다.

삼별초의 반란에 당황한 것은 개경의 원종 조정이었다. 반란 당시 이를 진압할 병력조차 제댁로 없었던 개경 조정 은 몽고에 원군을 요청, 1270년 11월 김방경 등이 이끄는 여․몽연합군이 진도 앞바다에 진출하 였으나 울둘목에서 삼별초군이 반격으로 대패하였다. 삼별초군은 수차의 전투에 잇달아 승리를 거두면서 방심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1271년 5월, 삼별 초군 중 상당수의 병력이 인근 남해안 일대에 나가 있는 사이, 개경의 정부군과 몽고군은 기습적 으로 진도에 상륙, 공격을 감행하였다. 공격을 전혀 예상치 못하였던 삼별초군이 조직적인 저항을 벌일 사이도 없이 진도성은 함락되어 승화후 온은 홍복원의 아들 홍다구의 손에 죽고 배중손도 전사하였다. 진도를 잃고 난 삼별초군은 김통정을 지도자로 하여 제주로 본거지를 옮겨 항쟁을 계속하였다.

1272년부터 삼별초군은 다시 활동을 제개하여 본토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1273년 2월 여몽연합 군 1만여 명이 제주의 삼별초군을 포위, 공격하였다. 삼별초군은 끝까지 용전분투하였으나 지도자 김방경은 산중으로 도피하였다가 죽고, 나머지도 모두 전사하거나 포로가 됨으로써 3년여에 걸친 항쟁도 종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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