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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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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5/11/26
 

고려시대...북방민족의 침략사

고려시대에는 북방민족 중,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웠던 거란과 여진족, 몽고족(원나라)의 침입이 빈번했던 것이 사실이다.

1. 거란의 침입

916년 '야율아보기'가 거란족을 통일하여 요나라를 세우고 세력을 넓혀 고려를 침입하였다.

1) 1차 침입
성종 12년(993)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여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고자 하였으나, 고려는 고구려의 후신임을 주장하는 서희의 담판으로 사신을 거란에 보낼 것을 약속하고 돌려 보냈다.

2) 2차 침입
현종 1년(1009) 고려의 김치양 사건에 강조가 나선 것을 빌미로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다. 강조 장군은 크게 패하고 전사하였으며 현종이 거란에 가기로 하고 끝냈다.

3) 3차 침입
현종 9년(1019) 고려의 혼란한 틈을 타서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개경까지 침입하였으나 강감찬 장군은 귀주에서 수공 작전과 잠복, 기습으로 물리치고(귀주 대첩)두 나라는 외교 관계를 맺게 되었다.
세 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략을 무찌른 고려는, 외적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성을 튼튼히 하고 함을 더욱 기르려고 노력하였다. 천리 장성은 바로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2. 여진의 침입

만주 지방에서 일어난 추장 영가는 여러 갈래로 흩어져 있던 여진족을 하나로 통일하여 갑자기 세력이 커졌다. 12세기 초에는 영가의 뒤를 이은 우야소가 더욱 세력을 키웠다. 우야소는 함흥 지방까지 넘나들었다
기병으로 이루어진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군대 양성(별무반 조직 . 윤관)이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

1) 윤관 장군의 별무반
기병대인 신기군, 보병 부대인 신보군, 스님으로 구성도니 항마군

2) 윤관의 9성
여진족을 몰아내고 차지한 곳에 9성을 쌓고, 남쪽 지방의 백성들을 옮겨와서 땅을 개척하며 살도록 함

3. 몽고(원나라)에 대한 항쟁

1) 몽고의 침입
고려에서 공물을 받아가던 몽고 사신 저고여가 압록강 근처에서 피살되자 책임 문제를 둘러싸고 양국 국교가 단절되었다. 이후 6차례나 고려를 침입하였으며 이에 대항한 삼별초의 항쟁은 고려인의 꿋꿋한 기상을 보여준 민족 자주 정신의 본보기가 되었다.

2) 삼별초의 항쟁 과정

최씨 무신 정권의 핵심 병력으로, 몽고와의 항전에서 가장 용감하게 싸운 삼별초는, 정부의 개경 환도를 몽고에 대한 굴욕적인 항복이라 하여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배중손의 지휘 아래 강화도에서 반기를 들었다(1270년). 그들은 먼저 강화도와 육지와의 교통을 끊고, 왕족인 승화후 온을 받들어 새로 관청을 설치하는 한편, 관리도 임명하여 개경의 정부와 대립하는 반몽 정권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개경이 가까운 강화도에서 오래 버티기 어려움을 느낀 삼별초군은 더 튼튼하고 안전한 근거지를 개경으로부터 먼 곳에 마련할 필요에서 전라 남도 진도로 옮겼다.
진도에 진을 친 삼별초군은 궁성을 크게 이룩하여 도읍으로서의 시설을 갖추는 한편, 격문을 발표하여 국민들의 항몽 의식을 북돋우었다. 이에 따라 많은 국민이 모여들면서 부근의 여러 섬과 해안 일대를 지배하여 하나의 해상 왕국을 이룩하였다.
삼별초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정부는 몽고와 연합, 고려․몽고 연합군을 조직하여 진도를 공격해 왔다. 1271년 고려․몽고 연합군에 의해 진도가 함락되면서, 삼별초군은 중심 인물을 대부분 잃었다. 나머지 세력은 김통정의 지휘 아래 제주도로 옮겨 가 항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이미 중심 세력을 잃은 삼별초군은 오래 지탱할 힘이 없어 1273년 고려․몽고 연합군에 의해 제주도가 함락됨으로써 전후 4년간에 걸친 삼별초의 대몽 항쟁은 끝났다.
삼별초의 항쟁은 비록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고려 무인들의 몽고에 대한 항쟁 의식을 잘 나타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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