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초기 독일군의 대공세로수세에 몰리던 소련군은 스탈린식의 공산독재주의식 생산성에 힘입어 방대한 군수물자와 군인력동원으로 독일 민간인들까지 극렬히 저항하는 제3제국 나찌스의 수도 베를린를 함락시켰다. 사실상 대전의 종결을 지은 이전투는 세계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투였다. 그러한 이유는 동부 전선에서 밀리는 전투상황하에 후퇴를 거듭하던 독일군과 독일국민을 상대로 저질러온 소련군의 만행은 널리 퍼져있었다. 나찌를 배격하던 독일인들 조차 비인간적이었던 소련군대의 공격에 자기가족들을 지킬목적으로 총을 잡았다. 소련군의 만행은 독일이 침략시 자행해온 살인,약탈 ,강간 의 전쟁범죄를 이제 앙갚음을 하듯이 독일 국민들을 상대로 보란듯이 저질렀다. 이는 전쟁이 인간에 끼치는 제일 극악한 피해상황을 보여주는 대표적 일례로써 악랄한 두 독재정권 치하에서 희생된 수많은 민간인들의 참상은 결코 지워질수없는 인류의 비애 였다.
멕시코정부가 마약 범죄조직 검거를 위하여 미국에서 수입한 50 캘리버(12.7mm) 수퍼 라이플
[M-107 제원]
생산국 : 미국 도입시기: 2002년 구경 12.7mm(50구경) 카트리지 50 브라우닝 기관총(12.7mm x 99mm) 시스템방식 Short recoil 중량 : 총 + 스코프 12.9kg 길이 1,448mm Take Down Mode : 965mm 총신길이 381mm 실탄장전수: 10발 평소 8~9발 최대사거리 (6812m) 실효사거리 (1829m)
미군의 저격용 12.7mm 50 구경 대형 라이플 M-107
전세계에서 납치범죄가 제일 극심한지역은 바로 중남미와 남미지역이다. 그중에서 멕시코는 납치범죄가 가장 극심하기로 악명높은 국가이다. 멕시코는 경제적으로 빈부의 차이 또한 대단히 큰 나라중의 하나로써 훤한 대낮에도 도로변에서 불특정다수에 대한 납치강도범죄가 빈번히 발생한다. 단적으로 일어났던 예를 들자면 멕시코시티에서 출근을 하던 어느 40대 남자는 도로에서 막히는 차량의 혼잡한 때에 갑자기 옆차에서 내린 범죄조직의 들이대는 총기에 납치되어 끌려다니다가 목숨을 담보로 집으로 전화를 걸어 600만원 정도의 금액을 가족에게서 받아 지불한뒤에 풀려날수 있었다한다. 이와같이 이들은 불특정다수 민간인및 어린 아동들을 가리지않고 유괴하거나 납치강도질을 하여 전화로 피해자가족들에게 돈을 요구하여 갈취하는 범죄를 저지른다. 이같은 납치강도의 범죄형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멕시코에서는 흔하디 흔한 범죄이자 우선적으로 척결시킬 국가적 병폐라고 할수있다. 그래서 수도 멕시코시티에서는 방탄차량을 흔히 볼수있는데 이는 부유하거나 가진자들은 그들의 신변을 보호하기위하여 특수제작된 미제와 독일제 방탄차량을 주문하여 구입하거나 중고 외제차량을 다시 방탄차량으로 제작하기도한다. 이러한 납치강도범죄의 예방차원에 대한 방탄차량의 폭발적인 차량구입 수요로 인하여 멕시코에서의 미제와 독일제 방탄 SUV 차량의 제작과 판매는 항상 호황을 이룬다. 주문제작된 방탄차량은 방탄유리는 물론 특수제작된 두터운 강판으로 강화되어 있어 웬만한 총탄은 관통시키기가 어려운 입장으로 제작되어 있다. 또한 이러한 차량은 멕시코 범죄조직이 구비한 필수차량이 되어버려 멕시코경찰들은 급기야 관통력이 큰 미제M-107 대구경 저격 라이플을 수입하게된다. 과거로 부터 잘알려져있는 멕시코인의 미국행 리오그란데강 넘기인 Wet Back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형태로써 매년 미국의 크나큰 골치거리중 하나이다.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는 멕시코의 일부 젊은이들은 범죄조직의 일원이 되거나 마약배달원이 되어 넓은 판매망을 갖고있는 미국 마약범죄조직에 물품을 팔기위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 모험을 벌인다. 그것은 마약판매의 이익금이 원가의 500배가 넘는 장사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과 멕시코사이에 체결된 나프타 자유무역협정도 그러한 상황을 야기시키는데 한몫을 했다고도 볼수있다. 멕시코 미국 국경지대 서민들의 생할모습과 풍경을 두루 살펴보면 진풍경같이 의외로 많디 많은 노상의 허름한 노점이 즐비한것을 볼수있다. 이는 미국 멕시코 자유무역협정에 따른 결과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수있다. 경제적으로 고통속에서 신음하던 이들은 일자리를 구하거나 마약밀매를 위해 미국으로 가기 위하여 멕시코국경을 넘어가다 경찰에 사살되거나 검거되기도 하지만 국경을 벗어났다해도 애리조나 사막지대의 폭염으로 인하여 굶어 죽기도한다. 이러한 상황을 애절하게 노래로 표현한 띠시 에노호사의 Don de voy는 그러한 불법이주자들의 고통을 잘표현해주고 있다. 또한 이렇게 불법으로 국경을 넘다가 사망하는 멕시코인의 수는 매년 약 400~450명에 이른다. 멕시코 정부는 갈수록 지능적이고 흉포화된 고성능 총기를 대량으로 구입하여 범죄를 저지르는 마약범죄조직과의 전쟁에 그들을 제압할 원거리 사격용 미제 M-107라이플을 뒤늦게 수입하여 배치하기 시작한 것이다.
히틀러의 베를린 사수작전 그것은 내일을 기약할수 없었던 독일의 필사적이었던 마지막 몸부림 이었다.
소련에 대한 항복보다는 미국과 영국과의 강화를 바라 보았던 히틀러의 마지막 도박이었지만 베를린을 향한 소련의 진격속도가 더 빨랐다.
1942년의 소련 동토의 스탈린그라드 참패이후 독일군집단은 차츰 모든전선에서 밀려났다.
1943년의 쿠르스크 전투의 패배이후 독일군은 그제까지나마 동부전선을 지탱해오던 기갑부대 병력의 90%이상을 소진해버렸다.
이로 인한 독일군의 전세는 패퇴일로의 입장으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북부군은 레닌그라드를 함락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소련군의 반격으로 발트해 3국으로 까지 전세가 밀리어 호르손 포켓반도에서 독일해군의 도움으로 대량의 병력을수송하여 본국으로 후퇴할수있었다.
그러나 그에 편승되지 못했던 병력은 동프러시아의 쾨니히스베르크까지 밀리면서 독일본토로 향하는 수많은 독일피난민의 이동을 보면서 소련군의 포격에 처참하게 죽어가는 피난민의 인파를 보아야했다.
독일 중앙집단군은 병력을 반으로 나누어 독일 남부집단군의 스탈린그라드로 보내었던 입장에 기갑병력이 대단히 약해진 탓으로 쿠르스크전에서 거의 독일기갑군전력의 대부분을 소진하고 말았다.
시간이 갈수록 세차게 밀려오는 쥬코프원수의 대대적인 공세에 수세의 방어적 전투로 몰려 점점 서쪽으로 후퇴할수 밖에 없었다.
만슈타인의 독일남부집단군도 흑해의 타만반도에서 케르치 로 또한 세바스토폴항을 버리고 점차 서쪽의 로스토프로 밀려 후퇴를 거듭했다.
1944년에는 이미 독일군이 점령했던 동유럽국가들은 모두 소련군에의해 장악되었다.
독일국경의 바로앞 이었던 폴란드 까지 소련군이 밀고들어와서 독일이 자행했던 인종학살의 현장이었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실상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소련군은 이 사실을 소련공산주의가 무슨 자비를 베풀었던양 전세계에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가운데 스탈린의 야심은 한시바삐 베를린을 먼저 장악하여 전후소련군의 기득권을 가질려고 붉은군대의 진격속도를 계속 앞당기는 지령을 내렸다.
독일군은 연신 패주를 거듭하는 가운데 해가 바뀌고 1945년 봄이 되면서 결국 수도인 베를린까지 소련군이 물밀듯 쳐들어오게 되었다.
소련에서부터 긴 이동을 하며 적국의 수도에 당도한 이들은 무었보다도 전날에 독일군에게 당했던 소련인의 고통을 그대로 재현하여 극심한 전쟁범죄를 자행했다.
여자는 나이를 가리지않고 강간했으며, 보이는대로 독일인 재물을 약탈했고 민간인들에대한 살인을 서슴치않았다.
독일의 장병들과 민간인들은 히틀러의 지령에 의한 베를린사수 보다도 결국 자기가족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쉴새없는 수천문의 대포에의한 소련군의 포격으로 베를린도시 자체는 폐허로 변해버려 며칠사이에 시체썩는 냄새가 곳곳에서 진동했으며 마실물과 식량은 구할수도 없었고 포탄에 맞아 죽은 말고기를 도려 먹는 시민들도 있었고 이곳저곳에 식량을 구하러 나오다가 소련군의 총질에 사살되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이러한 소련군의 무자비한 대독일전 형태는 독일시민들의 분개와 생존의식을 고취시켰다.
나라의 흥망보다도 개인의 생명이 걸려있는 급박한 상황으로 독일군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한사람의 전쟁인력이 아쉬운 입장이었다.
그래서 독일군은 보이스카웃 같은 유겐트 히틀러 소년부대에서 부터 60~70대의 노인들까지 묵은 소총부터 수류탄등 남아있던 모든화기들을 끌어내어 깡그리 동원시켰다.
그중 대표적 대전차화기는 바주카포였던 판쩌슈렉과 판쩌 파우스트의 사용법을 단시간 내에 가르쳐 민간인들을 소련전차를 상대로 겨누어 공격하게 했다.
이러한 공격은 중과부적같은 짓이었지만 전후통계에 의하면 베를린시가전 때에 판쩌 파우스트에 격파된 소련전차댓수는 엄청난 량에 달했다.
매분 계속되는 소련군의 포격에 의한 포탄량은 서부전선의 미영연합군이 이제까지 독일군에 대한 유럽상공에서 퍼부은 양을 능가하는 바였다.
소련 스탈린의 오르간 이라는 카츄샤로켓포의 발사소리와 터지는소리는 지옥의 불꽃놀이 그 자체였다.
대구경의 SU-122 와 SU-152 등의 자주포의 포화에 베를린시내의 각건물의 거점에서 소련군에게 발포하는 독일군의 기관총좌는 무참히 폭파되었다.
시가지 가운데서 소련군 카츄샤로켓이 연신불기둥을 뿜어며 발사되는 가운데 항복하는 노병의 독일군과 끝까지 숨어서 싸우는 소년병인 독일군과의 묘한대비로써 나이어린 소년병들이 더 필사적으로 싸웠다.
제3 제국의 상징이었던 독일 국회의사당의 나찌스 스바스티카(Swastika)는 소련군의 포격에 시커면 연기와 같이 폭파되면서 계단바닥으로 떨어져 내팽겨져버렸다.
독일이 유럽을 장악해온 영고성쇠의 세월중 마지막을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또한 베를린의 상징했었던 건물들은 온데간데 없이 그 형태와 온전한 상태의 건물을 볼수가 없었다.
브란덴부르크문은 시커먼 포화의 그을림으로 쓸모없는 돌기둥더미의 모습으로 변했으며 수많은 기관총탄 자국으로 문화재란 가치가 전혀 보일수없는 형상을 보였다.
마치 소련군은 지옥의 사신처럼 무법천지의 침략자로써의 잔인한 살륙과 약탈을 일삼았다.
이러한 약탈은 소련군부의 점령지 안정대책에 의해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을 우려한 소련군의 뒤늦은 민간인 살해,약탈금지령이 발표된 이후에 어느정도 진정되었다.
베를린 시청사 건물에 소련군의 붉은 적기는 올라가고 4월30일 히틀러의 자살소식과 히틀러의 유언에 의해 마지막 독일국가 총통이 된 카알 되니츠의 항복방송이 5월2일 라디오 전파를 타고 베를린 전역으로 흘러나왔다.
그러나 독일은 항복했어도 소련군에 대한 복수심으로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던 독일군병사의 총성은 도처에서 벌어지는 전투로 계속 들려왔던것이다.
5월 8일이 됐어야 비로소 독일이 연합국에 대한 공식적인 항복선언이 공표되었던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