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억새에 관한 추억
이태호
억새는 가을의 전령이다. 억새가 산과 들을 뒤덮을 무렵에 우리는 가을이 와있다는 신호를 읽을 수 있다. 물론 가을에는 코스모스도 핀다. 그러나 단아하면서도 가냘픈 꽃망울을 뽐내는 코스모스가 가을의 꽃이기는 하지만 그 생애가 어찌 억새만큼 길고 억세며 은은하랴.
과일나무들이 태양이 이글거리는 여름내 탱탱하게 영글어온 열매를 가을에 인간에게 선사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잎을 휘날린 후 앙상한 가지를 보여줄 무렵 여린 몸가짐으로 억새는 등장한다. 누구라도 꽃이라고는 별로 찾아보기 어려운 늦가을이나 초겨울에 당당하게 우리들 앞에 나타나는 억새를 보면 역사의 무대에서 요란한 각광을 받는 사람들과는 달리 이름 없이 나서 자라고 사라지면서 역사를 받쳐온 민중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억새는 워낙 평범하기에 꽃이 없다고 짐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억새는 화려한 장미나, 귀품이 있는 목단이나, 사람을 뇌쇄시키는 향기를 뿜는 라일락처럼 사람을 확 끄는 꽃은 아닐지라도 금빛이나 은빛의 꽃망울을 터뜨린다. 억새가 부채살 같은 꽃을 피워 올리고 휘날리는 바람 따라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고 가벼운 꽃씨를 사방팔방으로 띄워 보낼 때 사람들은 그것이 종족을 번식시키려는 본능의 발현임을 눈치 채지 못할 뿐이다. 억새는 유연한 허리를 바람결에 한들한들 흔들며 춤춘다. 논과 밭 또는 산에서 땀 흘려 일해 일용할 양식을 키우고 추수하는 기쁨을 못 이겨 논밭이나 마당에서 민요 가락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었던 우리네 조상들의 소탈한 모습을 억새는 재현한다. 강풍이나 폭풍이 불어도 좀처럼 부러지지 않는 억새는 조국의 역사가 이어져 오는 동안 때때로 휘몰아치는 회오리바람, 거센 풍랑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자신의 좌표를 꿋꿋이 증명해온 민중이다. 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유명산의 억새는 억새의 으뜸이라 할만하다. 산의 정상에 천군만마처럼 펼쳐진 억새가 하늘과 바람을 맞아 기쁨에 넘치고 깊은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들릴락 말락 낮고 긴 화음을 선사할 때 우리는 조국을 지킨 병사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돌과 바람과 여자로 상징되는 제주도의 억새는 해녀들처럼 아름답고 억센 기상을 자랑한다. 그 뿐 아니라 억새는 가을과 겨울에 전국 곳곳에서 우리를 맞는다. 올가을에는 밀린 일을 처리하느라 산야로 나갈 겨를이 없었던 나는 가을의 전령을 맞지 않을 수 없어 몇 주일 전에 서울 난지도의 하늘공원을 덮은 억새밭을 다녀왔다. 대자연은 인간들이 쓰레기 더미를 쌓아올린 터에 바람에 꽃과 풀과 나무의 씨를 날려 싱싱한 숲을 키우고 토끼와 다람쥐와 개미와 여치와 메뚜기와 새를 불러와 아름다운 생태공원을 이루어놓았다. 인간은 그곳을 조형하고 ‘하늘공원’이라 이름 지었다. ‘하늘공원’을 뒤덮은 억새는 에베레스트산이나 백두산처럼 높진 않지만 장애물이 없는 곳에서 무한히 펼쳐진 하늘을 우러러보고, 낮게 굽이치는 한강을 내려다보며, 고향의 향수를 달래는 서울시민들과 어울리기에 외롭지 않다. 향기는 없어도 단아한 얼굴, 바람 부는 방향으로 굽히는 허리, 그래도 부러지지 않을 만큼 온몸을 지탱해주는 억새의 발은 내가 억새인지, 억새가 나인지 모르게 했다. 세상의 많은 꽃들이 빨강, 분홍, 주황, 노랑, 파랑 또는 보라빛의 화려한 꽃망울을 뽐낸다. 그러한 꽃들은 청춘의 기상을 발산한다. 그러나 금빛이나 은빛으로 단장한 억새는 인생의 중간에 이르러 단맛과 쓴맛과 신맛을 웬만큼 맛보고 새로운 준비에 여념이 없는 장년층, 흰 머리카락 휘날리는 노년층을 닮았다. 억새는 부드러운 듯하지만 억세게 살아온 그들의 벗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억새가 흔하게 자라고 모습이 여리다고 다가서서 함부로 모가지를 비틀어 꺾어 상의 호주머니에 꽂기도 한다. 그 순간 억새는 완력의 희생자가 되고 만다. 역사상 강자에게 꺾이고 짓밟힌 민중이 얼마나 많더냐. 억새는 잎사귀 가장자리에 날카로운 비수 또는 은장도를 감추고 무법자들에게 항거한다. 억새 잎을 거칠게 만지는 사람은 무수히 박힌 잔 톱니에 손을 베기 마련이다. 우리가 억새 앞에서 힘을 자랑하려다가는 민중을 건드리거나 유린하려다가 경을 치거나 피를 본 권력자들의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억새 잎의 복판에는 흰색 잎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이어져 있다. 하얗게 한 개 한 개 박힌 점은 한 줄기 맥을 형성한다. 그것은 억새의 척추다. 대체로 청소년들의 척추는 곧고 바르지만 노인들의 그것은 휘고 굽는다. X레이를 찍으면 그 증상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난다. 생육기간이 짧건 길건 일정한 간격으로 쭉 뻗은 잎맥을 지니고 있는 억새야말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척추가 망가지는 인간들에게 허리를 잘 관리하라고 충고하는 듯하다. 만추를 지나 초겨울을 맞는 황량한 산과 들에 억새가 고요히 춤을 추고 있다. 하늘을 향해 두 손 모으고 때때로 모진 비바람에 몸을 맡기는 억새. 그는 어떠한 시련에도 꺾이지 않는다. 사람들이 물을 주지 않아도 강한 뿌리를 땅속에 박고 생명의 원천인 물을 뽑아 올리는 억새. 그는 결코 말라 죽지 않는다. 사람을 홀리지 않고 은밀한 속삭임으로 마음을 이끄는 억새. 그는 낮은 곳으로 임하는 사람들과 벗한다. 억새는 하늘과 땅과 사람을 아우르는 꽃이요, 풀이요, 민중이다. (출처 : 야후 블로그 ‘작은영혼’ 2009. 11. 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