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추적추적 내리는 비로 예상보다 추워진 날씨에 스페인 근교의 자그마한 호텔에 도착했다.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날씨 기복이 심해져서 여행 중 계속 날씨가 화창할 것이라는 현지 인솔자의 초기 예보는 여행 중 자주 빗나가고 있었다. 높은 천정으로 차가운 기운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그 호텔 로비에서 그녀는 각 방에는 다행히도 히터가 이미 작동하고 있으니 방에 들어가면 따뜻할 것이라고 안내를 했다. 하지만 방안에 들어서니 상황은 그 반대였다. 활짝 열려있는 창문으로는 빗발이 사정없이 들이치고 있었고, 썰렁한 그 방안에서 히터의 온기는 그 어느 구석에서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어쩌면 그 냉랭함은 열어놓은 창문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나는 서둘러 창문을 닫고 히터 작동여부를 확인해 봤지만 히터가 돌아가는 소리나 느낌은 여전히 감지되지가 않았다.
방을 청소하고 창문을 닫는 것을 잊을 정도의 사람이라면 히터를 켜놓는 것을 분명 잊어 버렸을거라고 생각한 나는 벽에 붙어 있는 히터장치를 이리저리 눌러보며 시험해 보았지만 히터는 찬바람만 뿜어낼 뿐 전혀 작동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른 방에서는 모두 히터가 들어오고 내 방의 히터만 고장 난 상태라고 추측한 나는 방을 바꾸어 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해 호텔로비로 내려갔다.
그곳에 내려가보니 다른 방도 같은 상황이었는지 일행 중 몇 분이 이미 그곳에 내려와 그녀와 호텔직원과의 대화를 팔짱을 끼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카운터 너머의 호텔직원들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그녀와 마찬가지로 영어가 그다지 유창하지 않은 그들과 히터문제로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호텔 도착 시 우리의 방을 배정해주었던, 나이가 좀 지긋한 예술가형의 남자 직원은 뒤에 조금 물러서서 다소 방관자인 듯 서 있었고 그녀는 새롭게 등장한 젊은 남자직원과 한창 언쟁 중에 있었다.
그 직원은 그녀에게 그들이 근무하는 카운터 밖으로 나가줄 것을 되풀이해서 요구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의 말은 완전히 무시한 채 계속 히터를 당장 틀어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 남자의 다소 무례한 어투와 벌개진 얼굴 그리고 손을 많이 사용하는 그의 몸짓에서 그가 말이 전혀 안 통하는 그녀의 막무가내 식의 집요한 요구에 인내심의 한계를 벗어나서 짜증의 경지에 들어서 있다는 것을 즉각 감지할 수 있었다. 그 직원은 히터를 가동시키는 계절이 아니라서 히터를 가동시키려면 기술자가 와야 된다며 내일부터 히터가동이 가능하니 제발 자신들의 근무지역 밖으로 나가줄 것을 계속 요구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직원의 어떤 말이나 설득이나 회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그녀 특유의 어눌하고 다소 느린듯한 말투로 히터를 틀어달라는 말을 되풀이 했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상대의 논리나 짜증스런 말투에 전혀 굴하지 않고 자신의 요구를 되풀이하는 그녀의 우직한 모습에 미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적 물리적 상황으로 결국 그녀의 끈질긴 요구는 그날 즉시 관철될 수는 없었지만 다음날 여행일정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온 우리는 그녀가 초지일관 보여준 꿋꿋함덕분에 따뜻한 온기가 가득한 방에서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공항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은 여행 기간 내내 우리와 함께 할 인솔자였다. 인솔자를 만나는 순간 전화 목소리로 상상해 보는 사람의 모습과 실제로 만나는 사람의 모습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다시 한번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출발 며칠 전 전화를 통해 처음 만난 그녀는 어투와 목소리에서 왠지 다소 둔탁한 외모의 키가 자그마한 여성일거라는 인상을 주었다. 그런데 막상 현장에서 만난 그녀는 모델로 나서도 될 만큼 늘씬한 키에 서글서글한 서구형 외모의 소유자로서 요즘 한창 떠오르는 손담비라는 유명한 가수를 연상시켰다. 그녀가 입고 있는 까만색 티와 바지 그리고 밤색 벨트는 그런 그녀의 외모를 더욱 세련되고 돋보이게 했다. 전화통화를 하면서, 첫번째 팩키지 여행이었던 싱가포르 여행시 외모나 업무 처리면에서 모두 대단히 엽렵하지 못했던 인솔자와 비슷한 유형의 여성일거라는 선입견은 그녀를 만나는 순간 확 바뀌었고,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이 즐거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떤 대상이든, 조화를 이룬 모습을 바라볼 때 기분이 좋아지고 호감을 가지게 되는 건 인간의 당연한 심리. 그래서 같은 여자끼리라도 아름다운 대상을 보면 그렇지 않은 대상보다 기분이 더 좋아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건 남자라는 대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고. 다만 아름답거나 근사한 외모로 처음에 시선을 끄는 대상은 그 매혹을 유지시켜주는 “it”가 내부에서 발산되지 않으면 금방 실망감과 싫증을 준다는 단점이 있다.)
자신이 인솔할 여행객들이 오는 것을 한 명씩 확인하던 그녀는 29명 전원이 다 모이자 모든 사람을 모아놓고 전반적인 진행사항에 대해서 간단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그녀의 외모를 보고 혹시나 했던 약간의 우려조차도 다행히 기우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예쁜 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유형 중에서 좋은 유형의 여성이었기 때문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무런 노력 없이 특별하게 예쁜 외모를 가지고 태어나는 여성들은(남성들도 마찬가지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쁘다는 이유로 주목을 받고 특별대접을 받고 자라나서 까닥하면 자기가 잘나서 그런 대접을 받는 것으로 착각해서 아주 이기적이고 못된 성격의 소유자가 되거나, 아니면 반대로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기 위해서 특별히 애를 쓰거나 기를 쓰거나 할 필요가 전혀 없어서 성격에 어떤 굴곡이나 콤플렉스가 형성될 이유가 없어서, 아주 온순하고 순수한 성격의 소유자가 된다.
그녀는 딱 부러져 보이는 외모와는 다르게 말투가 매우 어눌하고 털털하며 다소 4차원적인 요소도 가지고 있어서 두 가지 유형 중에서 매우 다행히도 후자의 유형에 가까운 여성이었다. 남성이라면 못된 예쁜 여자가 더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같은 여자의 입장에선 그녀의 다소 완벽하지 않은 넉넉한 마음씨가 그녀를 더욱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보이게 했다. 우리 일행에게(일행은 모두 예외 없이 중년의 여성과 남성들뿐이었다.) 마치 유치원 학생 대하듯 이야기하는 그녀의 끝올림 말투에 나는 계속 웃음이 나왔고 그런 그녀의 어눌함 덕분에 그녀에게 금세 친밀감을 느꼈다.
그녀가 말하는 스타일과 일하는 모습을 지켜본 나는, 그녀가 민첩하고 완벽하게 일 처리를 하는 여성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현지에 도착하자, 가이드가 통상적으로 하는 현지 역사나 특이사항에 대한 설명과 관련시설안내 등의 소프트웨어적인 요소는 노련한 현지 인솔자들이 전담했기에, 방배정이나 식사준비 확인 등, 하드웨어적인 요소만을 담당하는 그녀는 여행 내내 버스 앞 좌측 좌석에 앉아서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미모에 합당한 당당함으로 그녀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에서는 전혀 유창하지 않은 영어실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임무에 최선을 다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외모에서 비롯된 자신감으로 그녀의 유전자에 각인된, 어찌보면 무모할 수 있을 정도의 당당함은 스페인의 한 호텔에서 빛을 발하였는데…
이병률은 그의 여행관련 글들을 적은 Travel Note란 부제가 조그마한 글씨로 적혀있는 ‘끌림’이란 매력적인 제목의 책에서 인간이 자신의 존재 영역에서 어디론가 멀리 떠나는 이유를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그리고 그의 글로 인해서 나의 떠남은 시기 부적절성에도 불구하고 당당한 당위성을 지니게 되었다.
“지금 당장 먹고 싶은 것이 레몬인지 오렌지인지 그걸 모르겠을 때
맛이 조금 아쉬운데
소금을 넣어야 할지 설탕을 넣어야 할지 모르겠을 때
어젠 그게 분명히 좋았는데, 오늘은 그게 정말로 싫을 때
기껏 잘 다려놓기까지 한 옷을,
빨랫감이라고 생각하고 세탁기에 넣고 빨고 있을 때
이렇게 손을 쓸래야 쓸 수 없는
난감한 상황이 오면 떠나는 거다.”
그리고 또 그의 책에서는 이런 구절도 나온다.
“나는 여행하면서 이런 것들을 챙겨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여전히 신기하다.
-트렁크 가득한 책
(게다가 그걸 다 읽고 버리는 사람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평소 즐겨 먹는 원두커피
-두툼한 일기장
-잠옷
-애인 "
내 여행품목 리스트엔 다행히 트렁크 가득한 책도, 평소 즐겨 먹는 원두커피도, 두툼한 일기장도, 애인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유일하게 ‘잠옷’이 내 리스트에 들어 있지만, 그 이유는 여자라는 이유로 또한 정당화 될 수 있었다. 잠옷이란 남자에게는 여행 짐에 챙겨가기에는 자못 신기한 품목이 될 수 있지만 여자에게는 안 챙겨가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될 수 있는 품목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로 인해서 자질구레한 물품들을 챙기며 약간이나마 불편했던 마음 또한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었다.
이렇게 내 여행목적과 여행물품에 합당한 당위성까지 모두 갖춘 나는 마침내 스페인 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도심공항 터미널에서 출발하는 리무진버스를 타고 약 한 시간 정도를 달려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여행사에 모든 예약이 완료되고 커다란 모든 사항을 결정했지만 방문할 도시들의 이름만으로는 구체적인 여행 동선이 머리 속에 그려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기 전에 방문 지역을 구체적으로 도식화 하기 위해서 인터넷에서 스페인 지도를 프린트 한 다음 방문할 지역에 순서대로 번호를 매기기 시작했다. 네덜란드 암스텔담 공항에서 잠시 기다렸다 포르투갈행 비행기를 타고 리스본에 도착하면서 시작되는 이번 여행은 스페인의 세비아를 거쳐 남쪽으로 내려가서 모로코에서 이틀 숙박 후, 다시 스페인의 말라가로 올라간 다음 그라나다, 톨레도, 마드리드, 사라고사까지 계속 북쪽으로 이동해서 스페인 북동쪽에 위치한 바르셀로나에서 귀국하는 일정이었다.
여행일정이 일목요연하게 머리 속에 각인되자, ‘이사족’에 속하는 내가 착수한 다음 단계는 디테일한 짐싸기였다. 일단 베란다에 방치해 두었던 여행가방을 꺼내어 깨끗하게 닦아서 마루에 펼쳐놓은 다음 제일 처음 할 일은 여행에 가지고 갈 옷들을 결정하는 일. 다시 태어난다면 분명 패션 관련 일을 했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하는 나는, 그림을 통해 가슴속에 품고있는 예술적 열성을 표현하는 화가 친구를 보면서 나 자신은 그녀처럼 ‘그림’이 아닌 ‘옷’을 통해 그 잠재력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느 책에선가, 전시회나 음악회처럼 일부러 찾아 다니지 않아도 우리가 일상에서 매일 접하는 예술이 건축이라며 아름다우면서도 실용적인 건축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한 건축가가 있었지만, 나는 그런 건축물보다도 더 쉽게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고 누구나 조금만 신경 쓰면 잘 할 수 있는 예술이 바로 패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집의 크기를 계속 줄여가면 사람이 걸치는 옷과 접점이 생깁니다. 우리가 입는 외투가 확장되면 오두막이 되고 저택이 되죠”. 라고 이야기한 철학하는 미술가로 불리는 조각가 안규철 씨의 말에 절대적으로 공감한다.
패션은 우리 인간이 매일 일상에서 창의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일종의 예술이기에, 매일 옷을 입고 거리를 가득 메우는 우리는 모두 걸어 다니는 예술 작품과 진배없다. 따라서 우리는 옷을 선택할 때, 도시의 색을 결정짓는 걸어 다니는 아티스트들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옷의 색감이나 코디에 좀더 민감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옷이란 단순히 자신을 가리거나 그저 무엇인가를 몸에 걸친다는 수단이 아니라, 일종의 행위예술을 위한 도구로서 접근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저렴한 가격의 옷이지만 색감과 디자인을 잘 매치해서 멋지게 연출한 이들을 보면 바라보는 눈 또한 매우 즐거워지는 반면, 비싼 옷인데도 불구하고 지나친 장식으로 멋스러움을 가려버린 사람들을 보면, 지나침이 모자람 보단 못한 건축물이나 미술 작품을 보는 것처럼 괜히 안쓰럽고 안타까운 마음이 순간 생기는 걸 어찌할 수 없다.
그렇기에 여행 짐을 싸면서 여행에 합당한 옷과 신발 엑세서리 스카프를 준비하는 일은 내게는 중요한 여행 준비의 하나였다. 출장을 다닐 때는 옷가지 수를 최소한 하고 다양한 변화를 주기 위해서 일단 검은색 정장 한 벌을 기본으로 준비해서, 그 검정색 하의에 어울리는 차분한 색의 상의 서너벌과 다양한 스커프를 코디해서 입는 방식을 택하는 편이다. 하지만 여행이란 좀더 다양한 색채를 필요로 하기에, 최소의 옷가지로 지루하지 않은 효과를 내기 위해선 일목요연한 엑셀도표가 필요했다.
이번 여행 옷 준비가 여느 여행이나 출장보다도 더 까다로웠던 건 일단 계절이 바뀌는 시점인데다 여행일정도 길었고, 스페인의 지역적 특성 때문에 다양한 날씨를 모두 경험할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번 여행에서는 비 오는 봄 날씨부터 무더운 여름, 선선한 바람 부는 가을과 눈 오는 겨울까지 모든 계절의 날씨를 다양하게 경험할 수 있었다.) 그래서 최소한의 옷가지 수로, 더운 여름부터 초겨울에 가까운 다채로운 계절에 모두 대처할 코디가 필요했기에, 여느 여행이나 출장보다 옷가지 준비가 간단하지 않았다.
어쨌든 다소의 머리쓰기로 최소의 옷가지와 그와 함께 필요한 엑세서리, 스카프 준비를 마친 나는, 내 주위의 많은 여자들이 여행준비 할 때마다 가장 귀찮다고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화장품 준비와 기타 필요한 물품(이 리스트도 생각나는 데로 열거하다 보니 만만치 않았다. 비상약, 대일밴드, 실바늘, 여권, 호텔에서 신을 슬리퍼, 우산, 다리미, 유럽용 소켓, 물스프레이, 헤어스프레이, 드라이어, 샤워용퍼프, 샴푸와 린스, 치약과 칫솔, 기내에서 읽을 책, 휴지, 빗, 샤워캡, 세수용머리수건, 잠옷, 선글래스, 카메라와 충전장치, 유로, 옷핀, 속옷, 양말, 물티슈, 손목시계, 과자, 알람시계)을 모두 준비하고 나니 출발일이 바로 다음날로 다가왔다.
이렇게 여러 날에 걸친 고민과 고뇌와 연구를 통해서 여행 상품을 간신히 결정하고 나니 또 다른 결정사항이 내게 주어졌다. (우리의 일상에서 의식/무의식적으로 우리에게 끊임없이 요구하는 ‘결정하기’란 과정은 ‘그저 아무 생각없이 놀겠다’는 단순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도 중단없이 그 체계를 작동시키고 있었다. 그것도 매우 끈질길 정도로 집요하게.) 과연 이 험란한 시점에 추가비용을 감수하고 혼자만의 독방을 고수할 것인가 아니면 비용절감 차원에서 혼자만의 공간을 포기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피부로 직접 느끼는 경제위기 보다는 매스컴에서 쉬지 않고 내 머리 속에 주입시키는 경제위기론은 나로 하여금 혼자서 방을 쓰고 싶다는 욕구에 죄의식을 심어주며 다른 여행자와 함께 방을 쓰는 쪽으로 내 마음이 가도록 나를 설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여행스타일을 냉정하게 생각해 볼 때, 다른 사람과 방을 같이 쓴다는 것은 나의 12일간의 여행자체를 서울에서 일하는 것보다 더욱 스트레스를 받게 할 공산이 컸다. 따라서 나는 70만원이라는 거금의 추가 여행비를 지불하고서라도 혼자서 방을 쓰겠다고 여행사에 통보하는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주위의 지인들이나 기타 여러 여행자들의 면면을 살펴 보면, 크게 두 가지 형태의 여행객으로 귀결된다. 마치 이웃집에 놀러가듯 여행 전 사전조사나 준비는 거의 생략하고, 짐도 하루 전날 적당히 가볍게 챙겨서 떠나는 ‘대충족’과 마치 새로운 나라로 이민가듯이 여행 전 그 나라 관련 서적도 뒤적이고 인터넷에서 관련 자료 모두 프린트해서 다양한 색의 형광펜으로 밑줄 치고, 별표시, 물음표 표시 해가며 사전 준비와 점검을 철저히 하고, 출발 몇주일 전부터 엑셀로 리스트 만들어서 하나씩 체크해가며 이사가는 수준에 버금가는 짐을 챙겨서 떠나는 ‘이사족’의 두가지 형태로 크게 분류된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어느 족에 속하는 여행객인가? 두말할 것도 없이 후자인 ‘이사족’이다.
이런 성향은 사실 어렸을 때부터 나도 모르게 -어쩌면 매사에 계획적인 부모님의 성향에서 물려 받은 가족력일 수도 있다 -내 속에서 발현된 성향이다. 학창시절, 시험일정 발표 나면 그날 집에 돌아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시험기간까지 남은 요일에 따른 공부계획표 세우는 일이었고, 시험 공부할 때도 책상 위와 주변이 깔끔하게 정리정돈이 되어 있어야 공부가 잘 되는 스타일 이었다. 이런 나의 습관은 직장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그대로 이어져서 무슨 일이든 일단 일목요연한 계획표를 작성 한 후 일을 시작해야 그 일을 제대로 해내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과연 매우 이과적이고 수학적인 두뇌가 뛰어난 사람인가? 절대로 아니다. 숫자 관념과는 워낙 머리가 멀어서 방금 슈퍼에서 산 콜라나 과일 값도 슈퍼 문을 나서는 동시에 그대로 뇌에서 빠져나가고, 방향감각은 절대로 존재하지도 계발되지도 않아서 일단 지하도에 들어가면 엉뚱한 출구로 나가지 않기 위해 모든 오감과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그리고 한번 갔던 장소 다시 찾으려면 늘 생소해서, 중학교 때 축제 오라고 초대한 친구 학교 찾아 나섰다 결국 못 찾고, 한창 수줍고 창피할 나이라 주위 사람에게 물어보지도 못한 채 그 주위를 헤매다 처참한 기분으로 다시 집으로 돌아온 기억도 있다. 하지만 요즈음은, 길 위에서 갈 곳 몰라 당황하고 헤맬 때마다, 어찌 보면 이렇게 두 가지 극단적인 성향을 동시에 가짐으로써 나름 성품의 균형을 이루었기에 주위에 좋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성질 까다로운 X’란 소리 듣지 않고 살아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번씩 하곤 한다. (그런데 요즈음은 부쩍 ‘착한 여자’로 불리는 여자보다는 ‘성질 까다로운 X’란 소리를 듣는 여자들이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니 무슨 때늦은 인생의 조화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