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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nyan (atelier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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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5/11/09
 

추억의 간식, 꾸이띠야우

어느 화창한 가을날, 후배와 함께 가을 나들이에 나선 나는 경복궁을 오른쪽에 두고 효자동을 지나 청운동 경복고등학교를 지나면서 길 건너편 나무에 가려진 근사한 건물을 바라보면서 후배에게 물었다.

“저건 무슨 건물일까?”

내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던 그 후배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무에 살짝 가린 현판 끝자락에는 ‘Darussalam’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익숙하면서도 그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그 글자를 보며 나는 늘 영민함으로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후배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다루살람이네. 왜 들어봤지, 저 나라. 저 나라 대사관 건물인 것 같은데. 저 나라 많이 들어봤는데 어디에 있는 나라더라?”

하지만 늘 소소한 일상의 질문들에 정확한 정답을 가지고 있던 후배는 나의 질문에 그저 머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생각이 날 듯하면서도 생각나지 않는 일이 있을 때 흔히 느끼는 오감의 간지러움을 느낀 나는 고개와 몸을 오른쪽으로 젖히며 나무에 가려진 현판의 좌측 글자를 마저 읽어 내렸고, 곧 후배의 등을 가볍게 툭 치며 멋쩍은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나무에 가려진 글자는 “Brunei” 그곳은 다름 아닌브루나이 다루살람Brunei Darussalam”, 즉 우리가 통상적으로브루나이라고 부르는 나라의 대사관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후배가 다루살람이라는 단어에 연관성 있는 그 어떤 표정도 지을 수 없었던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다루살람은 고사하고브루나이라는 이름조차도 후배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 사는 대부분 사람에게는 그 어떤 감흥도 불러 일으킬 수 없는 단어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브루나이 다루살람은 내게는 추억의 한 덩어리를 한 움큼 가슴속에서 캐내기에 충분한 그런 단어였다. 아니 충분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가슴 뻐근함과 아릿함마저 불러 일으키는 그런 단어였다.

‘브루나이’. 내가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사춘기 시절인 중학교 시절을 몽땅 보낸 곳인 동시에 내가 평생 영어로 먹고사는 삶을 시작하게 한 출발점이 된 그곳은 고향의 향수를 불러일으킬 만큼 내 인생에서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곳에서 보낸 중학교 3년 시절은 마치 전생에서 보낸 시간처럼 늘 아뜩한 기분과 아련한 추억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해외여행이 거의 불가능했던 그 시절, 해외 근무지로 새롭게 발령을 받은 아버지를 따라 온 가족이 브루나이라는 나라로 날아간 것은 중학교 1학년이 거의 끝나가던 겨울이었다. 보루네오 섬 북쪽에 있는 그 나라는 그 당시(그리고 지금까지도) 한국 사람뿐만 아니라 이 세상 많은 사람에게 지극히 생소한 나라였다. 1년 내내 고온다습한 그 낯선 나라에 남편과 아버지를 따라 잠시 이주한 일곱 세대는 브루나이의 4대 도시 중 하나인 쿠알라 블레이트(Kuala Belait)란 곳에 3년이란 세월을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하지만 쿠알라 블레이트는 도시라고 불리기에는 너무나도 한적하고 조용한 곳이어서, 우리는 북적거리던 대도시 서울에서 비행기를 타고 산 넘고 물 건너 어느 고즈넉하고 한가로운 시골 마을로 낙향한 듯한 기분이었다.

낯선 나라에 도착한 일곱 가족의 부모들은 대한민국 학부모의 그 열렬한 학구열을 예외 없이 발휘해서 시내에 있는 공립학교를 마다하고, 자녀를 모두 그곳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세리아(Seria)라는 도시의 외국인 학교에 입학시켰고, 매일 우리를 그곳까지 차로 데려가고 데려오는 수고를 전혀 귀찮아하지 않으셨다. 서울에서 여성이 차를 몰고 다닌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었기에 엄마들은 차로 아이들을 실어 나르는 것을 마치 즐거운 여가활동쯤으로 여기는 듯했다.

도착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 나를 포함한 여학생들은 영국 수녀들이 운영하는 세인트 엔젤라스 컨번트 스쿨(St. Angele’s Convent School)에 그리고 남학생들은 여학교에서 100미터 정도 떨어진 건물에 있는 세인트 마이클 스쿨(St. Michael School)에 입학하여 학교생활에 적응해가기 시작했다. 그곳의 학교 시스템은 한국과 그리 많이 다르지 않았기에 우리는 언어에서 오는 어려움을 제외하고는 그리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그리고 국제학교라고는 해도 백인보다는 브루나이의 부유층 중국 학생이나, 말레이, 인도 학생이 더 많았기에 동양인끼리 느끼는 동질감 덕분에 인종적인 괴리감이나 인종차별도 거의 느끼지 않았다.

한 가지 한국 학교와 달랐던 것은 열대지역에 있는 더운 나라여서 학교를 마치는 시간이 다소 일렀기에 점심시간 대신 오전 11시경에 20분 정도 간단한 간식을 먹는 시간이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내 기억으로는 그 시간에 별도의 간식을 챙겨 와서 교실에서 먹는 학생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대부분 학생은 그 시간이 되면 학교 마당 한편에 마련된 자그마한 간이 포장마차 같은 곳에서 과자, 초콜릿, 오징어 등으로 군것질했는데,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던 품목은 주인아저씨 부부가 그 짧은 시간에 신속하게 만들어 팔던 국수였다. 우리는 그 시간만 되면 모두 교실 밖으로 뛰어나가 중국인 부부가 정신없이 바쁜 가운데서도 기가 막히게 우리 입맛에 딱 맞게 만들어 주었던 국수요리를 앞다투어 사먹곤 했다.

그곳에선 늘 두 가지 국수 요리를 팔았는데, 하나는 노란색 라면과 비슷한 면(이것이에그누들이라는 것은 최근에 알았다.)을 따끈한 국물에 자작하게 담아 접시처럼 얕은 그릇에 담아낸 국수요리였고 또 다른 요리는 신문지 위에 얹은 비닐에 싸여 나오는 국물 없는 진한 갈색의 면 볶음 요리인꾸이띠야우였다. 이 두 가지 요리는 한국 학생들의 입맛에 똑같이 잘 맞아서 중국집에 가면 짜장과 짬뽕 사이에서 늘 선택을 망설이듯이 우리를 망설이게 했으며, 외국에서 의사소통의 어려움 때문에 느끼던 좌절감을 잠시 잊을 수 있는 최소한의 여유를 허락해 주었다.

이 두 가지 요리 가운데 지금도 이름을 전혀 알 길이 없는 국물 국수는 다른 어느 음식점에서도 찾을 수 없었지만(나는 아직도 이 국수의 맛을 잊을 수 없다. 그 맛은 아직도 명확하게 내 기억창고에 각인되어 그 국수를 떠올릴 때마다 입맛을 다시게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는 전혀 생각나지 않고 그와 유사한 국수를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먹어본 적이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중국인 부부만의 특수한 요리법으로 만든 국수가 아니었나 싶다) 볶음 국수인꾸이띠야우는 그곳 거주민들이 우리나라 자장면만큼이나 즐겨 먹는 서민 요리였기에 어디서나 흔히 먹을 수 있었다. 게다가 워낙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엄마는 한번 그 요리를 맛보고 나서, 주로 시장이나 허름한 식당에서 파는 그 요리의 청결성에 의심을 품으시고정갈한 꾸이띠야우를 집에서 자주 만들어 주시곤 했다.

꾸이띠야우의 조리법은 매우 간단하다. 먼저, 중국식 커다란 후라이팬(Wok)에 식용유를 붓고 달군 다음, 약간의 돼지고기와 마늘을 듬뿍 넣고 몇 번 뒤적이고 나서, 넓고 물기가 촉촉한 젖은 쌀 생면과 간장을 넣고 재빨리 볶는다. 그런 다음 계란을 두르고, 마지막으로 숙주를 한 움큼 넣고 다시 잠깐 뒤적인 다음 접시에 담아내면 된다. 이처럼 꾸이띠야우는 짧은 시간에 쉽게 해낼 수 있는 요리이기에 워낙 면을 싫어하시는 아버지를 제외한 우리 식구의 단골 메뉴였다. 그리고 그 식성은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여전해서, 엄마는 꾸이띠야우를 남동생과 나를 위해 자주 식탁에 올리셨고, 그 요리를 먹을 때마다 나는 그 옛날 중국인 부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별다른 조리 시설도 없던 그 좁은 포장마차에서 중국인 아저씨는 속성으로 중국말을 쏟아내며 거의 신기에 가까운 손놀림으로 그 짧은 시간에 쉴새 없이 수많은 국수를 만들어 냈다. 깡마르고 자그마한 체구. 광대뼈가 두드러진 까무잡잡한 얼굴. 두 눈이 유난히 크고 휑했던 그 아저씨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꾸이띠야우가 당연히 중국 음식이겠거니 생각한 나는 서울에 돌아온 이후 중국 음식점에서 식사할 때면 그 맛이 그리워서 그와 비슷한 요리를 찾아보곤 했지만, 메뉴에 적힌 이름만 보고 나름대로 상상력과 추측을 동원해서 주문한 요리는 항상 내 예상을 빗나가서 엉뚱한 요리를 먹고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나는 꾸이띠야우란 음식의 유래가 궁금해져서 인터넷을 검색했고, 그 음식이 캄보디아에서 시작되었으며 원래 이름이꾸이띠유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예로부터 쌀이 많이 나는 지역에서 밀 대신에 쌀로 국수를 만들어 먹었는데 이것이놈번쪽'이란 요리로서 꾸이띠유의 전신이며, 전설에 따르면 놈번쪽 맛을 본 중국 귀족이 본토로 넘어가 비슷하게 흉내 내어 만든 것이 꾸이띠유이고 그 맛이 놈번쪽보다 더 좋아서 캄보디아로 다시 전해졌다고 한다.

최근에 다양한 외국 음식을 주 특기로 내세우는 음식점이 많아지면서 나는 제대로 된 꾸이띠야우를 맛보고 싶다는 욕심에 베트남 식당과 타이 식당의 꾸이띠유를 검색해 보았지만 블로그 사진으로 보는 그 요리들은 내가 브루나이에서 맛보았던 볶음 국수면이 아닌 국물이 넘칠 듯 담긴 국물 위주의 요리들이었다. 추측하건대, 브루나이에 사는 중국인들은 캄보디아에서 흘러들어온꾸이띠유란 요리를 다시 한 번 그 지역 특유의 음식으로 변형하여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중국 음식 자장면처럼꾸이띠야우를 탄생시킨 것 같았다.

이탈리아 요리의 열풍이 서울을 휩쓸면서 꾸이띠야우에 대한 갈증을 잊고 지내던 나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청담동의 홀리차우란 중국 음식점의 메뉴에 올라간 사진에서 꾸이띠야우와 매우 흡사한 요리의 사진을 우연히 발견했고, 몹시 흥분해서 주문한 그 요리의 맛은 브루나이에서 먹었던 꾸이띠야우의 맛과 아주 흡사했다. 이 놀라운 발견을 남과 나누고 싶었던 나는 웬만한 요리에는 절대로 후한 점수를 주지 않는 엄마를 그곳에 모시고 가서 맛을 보시게 했고, 마침내 엄마로부터 매우 후한 점수를 받았다.

그 후로꾸이띠야유가 생각날 때면 나는 홀리차우를 찾아가 철없이 즐거웠던 그 시절을 돌아보곤 한다. 그러면서 사람의 추억을 환기하는 여러 감각 가운데 미각의 중요성을 새삼 확인한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제2의 인생을 만들어가는 이국에서의 또 다른 삶을 꿈꾼다.

banyan 2009.10.13  00:04

아는 지인이 요리관련 책을 낸다고 해서 그 책에 실을 2가지 내용 중 한가지를 이곳에 올려본다.
추억을 되새김하다보니 기억의 창고에 숨겨져있던 사건들이 스멀스멀 올라와 기다란 이야기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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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10.13  13:42

[귓속말 입니다.]

Zoomarella 2009.10.14  00:07

모두에게 음식과 연관된 추억들이 있겠지요? 아주 강한 맛으로 떠오르는 추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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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2009.10.30  00:52

꾸이띠야우 한번 맛을 보아야 겠군요.... 홀리차우? 찾아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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