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는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배워보는 악기라는 점에서 단한번도 내게서 그 어떤 특별한 관심을 이끌어 낼 수 없었다. 그 악기는 늘상 아침저녁으로 무심하게 얼굴을 마주하는 아내나 남편처럼 그저 무미건조한 일상과 같았다.
세월의 깊이가 더해가면서 조미료가 전혀 가미되지 않은듯한 덤덤한 피아노 소리보다는 다소 심금에 울림을 주는 관현악 소리에 조금씩 심취하기 시작했고, 그때만 해도 나의 뇌신경을 건드리는 현소리는 스트레스 받는 일상에 청각을 더욱 피곤하게 하는 소리로 간주하여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
그런데...
늘 핀잔을 주던 남자 동료에게서 어느날 뜻하지 않은 남성적인 매력을 발견하듯 언제부터인가 모든 현악기의 소리는 내게 특별한 감흥을 일으키며 나의 오감을 마디마디 흔들어 놓기 시작했고, 나는 요즘 아침에 눈을 뜨면 심포니, 협주곡, 독주곡을 마다하지 않고 무조건 현소리가 나는 CD의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그 소리에 취해서 잠을 깬다. 그리고 그 악기 소리에서 베토벤과 브람스와 차이코프스키의 남성적 카리스마와 비애와 고뇌를 동시에 느낀다.
내 어찌 알았으랴? 현악기들이 이토록 섹시한 소리를 내는 줄....
오늘 오후 출근길에 늘 애청하는 93.1FM의 정만섭씨의 프로를 들으며 왜 많은 이들이 현소리에 노예가 될 수 밖에 없는지 그 해답을 찾았다.
피아노는 두드려서 소리를 내는 악기이고 관현악기는 불어서 소리를 내는 악기인 반면 현악기는 켜야 소리가 나는 악기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때론 흐느끼고 때론 울부짖고 때론 숨넘어가는 현소리를 들을때마다 나는 연주자의 손길에 온 몸으로 반응하는 현의 몸부림을 고스란히 느낀다....
여린왕자님의 절묘한 타이밍에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오늘 출근길에 정만섭씨의 프로에서 들려주는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전악장을 듣고 오면서 현소리가 미치도록 좋아 차를 타고 강속으로 뛰어들지 않고 일터에 무사히 도착한것이 신기할 정도이니까요.
다만 윗글에서 멘델스존을 거론하지 않은건 왠지 그의 음악은 남성적인 느낌보다는 여성적인 느낌의 우아함이 더 많이 느껴져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