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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오 의원, 돌아오다
글 : 박신 * 출처 : http://www.leejo.net/ - 이야기해요 * 등록일 : 2008년 06월 07일 11시 53분 52초 왕망은 60여명의 참모와 100만명의 병력으로 10만명의 적군을 포위해놓고서도 적군에게 패배를 당했다. 100명의 참모가 있으면 뭘 하나? 유비는 한 사람의 제갈량으로 나라를 세웠고, 힌덴부르그 장군은 한 사람의 부관 때문에 이름을 날렸다.
이재오 의원은 왜 미국을 갔을까? 죠지 홉킨스 대학에서 초빙강의를 한다는데, 이야말로 전쟁을 하다말고 전장을 떠나 한가로운 서당의 훈장 노릇을 하는 격이 아닌가. 사람들은 오늘 일도 어떻게 될지 모르면서 1년 후 10년 후의 일을 걱정한다. 세계를 정복하려든 알렉산더가 젊은 나이로 요절할 줄 누가 알았는가? 인도의 지나교 수도승들처럼 사는 것이 인생이다. 이글을 본다면 돌아올 것이다. 행정부에서 역할을 하려면 이달에라도 돌아올 것이고, 당에서 역할을 하려면 7월에나 8월에는 돌아올 것이다. 왜냐하면, 정국은 강성정국으로 진행하도록 돼 있다. 이명박 정부는 보수, 우익 정권이지 전 정권의 연장인 좌파정권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는 좌파들의 난동과 잔재를 청산하고 혼란과 어려움에 처한 한국을 개조할 사명(Vision)이 있다. 당근과 채찍이 동시에 필요한 이유는 당근 옆에 채찍이 있음으로써 상대방은 당근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통합민주당은 여전히 대모꾼들의 집단이다. 비록 지역에서 당선되었더라도 헌법상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이다. 모든 정치적 활동은 원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박상천 대표가 정치력을 발휘해야 하는데 장악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야당은 쇠고기 재협상을 계속 물고 늘어질 것이다. 정ㅂ, 여당은 시급한 국정문제, 민생문제를 강도 높게 추진해야 한다. 쇠고기, FTA 정국을 푸는 해법은 박력있는 국정 수행으로 국민이 꿀맛을 맛보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정부, 여당 간에 엇박자의 간극이 크게 보인다. 쇠고기 재협상과 한미FTA의 포기는 외교적으로나 무역으로 생존하는 한국으로서는 있을 수가 없다. 세계는 현재 자원전쟁 중이고 경제전쟁 중이다. 역사상 모든 무력충돌의 동기는 자원경쟁과 경제적 마찰이다. 앞으로 5년간 한국이 경제, 군사기술적으로 선진국이 되지 못하면 아시아나 아프리카 빈민국들처럼 영원히 2류 3류 국가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선진한국이 되고 성장동력을 끌어올리려면 모든 사회제도를 정비할 것이 시급하다. 헌법도 고쳐야 하고 형법도 교쳐야 하고 특별법들도 정비해야 한다. 국가백년대계를 위해 현행 교육제도도 학습과정을 중심으로 국가목적적이고 실용적이고 사회기능적인 내용으로 개혁해야 한다. 부실한 행정, 금융, 산업, 외국유학 등으로 낭비와 국부가 새어나가는 것도 정비하는 것이 시급하다. 좌익이 준동하면 우익을 강화해서 막고, 그래도 식지 않으면 모든 공권력을 동원해서라도 원천봉쇄 하면서 국정을 차질없이 착착 진행시켜야 한다. 정권교체를 한 지 아직 3개월 밖에 되지 않았다. 전 정권의 잔재들에게 휘둘리지 말고, 국가의 모든 주요 기관에 가시처럼 박혀있는 잔재들을 찾아서 뿌리를 뽑아버려야 한다. 지금 방송국의 데모꾼들을 선동하는 꼴을 보라. 이게 정권이 바뀐 모습들인가? 발바닥에 그런 큰 가시가 박혔는데 어떻게 제대로 걸어갈 수 있겠는가. 앞으로 국제환경의 급속한 변화는 국내 경제사정을 점점 더 악화시킬 것이다. 한국이 지금 쇠고기 따위로 허성세월 할 때가 아니다. 국민 모두가 정권과 정책을 지지하기를 기대하지 말라. 아무리 정치를 잘해도 반대는 있기 마련이다. 반대하는 자들은 반대하는 것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금 건설업체의 부도율이 50%다. 대운하라도 만들어야 숨통을 터줄 수 있다. 철저한 계획과 철저한 준비로 과감하게 집행하라. 경찰버스를 세 대씩이나 파괴하는 자들을 왜 그냥 두는가? 일부 극렬한 반대자들 때문에 전체 국민을 실망시키거나 무기력하게 만들지 말라. 무기력한 대통령이 되든지, 여론을 선도하는 탁월한 대통령이 되든지, 목숨을 내놓고 철권의 혁명가가 되든지 바야흐로 선택할 때다. 나 같으면 역사의 “뉴 챕터(새로운 장)”를 쓰는 쪽을 택하겠다.(끝).
[이렇게 대통령을 만든다]
동양고전서 배우는 民心잡는 법 이코노믹리뷰 (2007년 11월 26일 (월) 06:19)

◇“제왕들은 예의염치를 버렸다”◇ 제17대 대선이 코앞으로 닥쳐오면서 대선 캠프마다 각종 선심성 공약을 잇달아 쏟아내는 등 민심을 사로잡기 위한 ‘득민술(得民術)’ 구사에 여념이 없다. ‘득민’은 ‘득국(得國)’의 지름길이다. 아무리 흉중에 고매한 ‘치국(治國)’ 방략을 품었다 할지라도 득국에 실패해서는 결코 그 뜻을 펼 길이 없다. 수많은 웅걸(雄傑)들이 하나같이 난세에 ‘구국제민(救國濟民)’의 기치를 내걸고 ‘득민’에 심혈을 기울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득민’이 생각처럼 쉽지 않은 데 있다. 이는 민심이 상황전개에 따라 수시로 변하기 때문이다.
동양에서는 이런 이치를 이미 수천 년 전부터 꿰뚫어 왔다. ‘민심무상(民心無常)’이 바로 그것이다. 이를 두고 맹자는 일찍이 “민심이 곧 천심(天心)이고 천명(天命)이다”라고 단언한 바 있다. 동양에서는 이미 기원전부터 ‘민심=천심=천명’과 ‘민심무상=천명무상’의 이치를 통찰하고 있었던 셈이다. ◇“득민술의 요체는 감성 마케팅”◇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득민술’의 요체는 백성들의 감동을 자아내는 데 있다. 이에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로 왕망(王莽)의 신(新)나라를 들 수 있다. 신나라는 중국 역사상 신민(臣民)의 전폭적인 지지 하에 무혈(無血)로 창업에 성공한 유일무이한 경우에 해당한다. 당초 외척 출신인 왕망은 매우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했으나 주변의 신망을 토대로 이내 출사(出仕)한 뒤 승승장구하여 마침내 천하를 거머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당시 그는 관직이 올라갈수록 더욱 공손한 자세를 견지해 사대부들의 칭송을 받았다. 한번은 조정 고관의 부인들이 그의 모친을 문병하러 왔을 때 그의 부인이 나무비녀를 머리에 꽂고 남루한 옷차림으로 이들을 영접했다. 그녀를 시비(侍婢)로 여긴 귀부인들은 얼마 후 그녀가 왕망의 부인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왕망의 검소한 생활태도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자신을 세인들에게 널리 홍보했다. 왕망이 구사한 ‘득민술’은 혈육의 정을 끊고 자식에게 자진을 명하는 대목에서 그 진면목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그는 시비를 죽인 차남에게 자진을 명한 데 이어 사소한 잘못을 저지른 장남에게마저 조정의 기강을 문란케 하고 백성을 미혹하게 만들었다는 죄목을 씌워 자진을 명하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에 감복한 태황태후는 전국에 조서를 내려 왕망이 공명정대하게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은 일을 모두 본받아 행하라고 명했다. 백성들 내에서 왕망에 대한 칭송이 높게 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당시 왕망은 민간 사이에 유행하는 소위 ‘참위설(讖緯說)’을 이용해 민심을 사로잡는 특이한 책략을 구사했다. 그는 천명을 상징하는 ‘부명(符命)’을 교묘히 날조해 백성들로 하여금 새 왕조의 출현을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게끔 만들었다. 참언(讖言)을 돌에 새겨 넣은 뒤 이를 우물에 빠뜨려 놓았다가 우물물을 긷던 중 우연히 돌을 건져 올리도록 하는 식의 방법이 동원되었다. 이어 그는 심복들을 대거 풀어 주막집 등에서 자연스럽게 백성들과 만나 조작된 ‘부명’을 널리 선전토록 했다. 현대 ‘PR전’의 원형이 이때 이미 등장한 셈이다. 당시 내막을 모르는 순진한 민초들은 새 왕조의 도래를 의심치 않았다. 왕망의 청검한 삶을 신뢰한 사대부들 또한 이들 민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흠(劉歆)과 양웅(揚雄) 등 당대의 명유들을 포함해 수많은 문사(文士)들 역시 바삐 돌아다니며 그의 선전에 열을 올렸다. 왕망은 일종의 ‘조작된 대세론’을 구사해 득국에 성공했던 셈이다. 왕망의 신나라를 무너뜨리고 후한제국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역시 ‘조작된 대세론’을 통해 천하를 거머쥔 경우에 해당한다. 원래 그의 본명은 유문숙(劉文叔)이었다. ‘문숙(文)’을 ‘수(秀)’로 바꾼 것은 참언(讖言)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나라 안에는 “유수(劉秀)가 군사를 일으켜 새 주인이 된다”는 참언이 나돌았다. 이는 조선조 때 등장한 《정감록(鄭鑑錄)》의 효시에 해당한다. 당시 왕망의 군사들은 광무제의 군사가 나타나기만 하면 참언을 믿고 도주하기에 바빴다. ◇“조작된 대세론으로 천하 거머쥐어”◇ 사실 여타 왕조의 창업주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민심을 얻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왕망 및 유수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명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이 가계를 위조하는 소위 위보(僞譜)를 시도한 것이 그 실례이다. 원래 주원장은 젊었을 때 호구지책으로 승려가 되어 각지를 떠돌아다니다가 홍건적(紅巾賊)에 가담한 불미스러운 전력이 있었다. 그는 곽자흥(郭子興)이 이끄는 반군(叛軍)에 투신한 후 승승장구해 진우량(陳友諒)과 장사성(張士誠), 한림아(韓林兒) 등의 군웅을 차례로 격파한 뒤 마침내 중원통일에 성공했다. 주원장은 훗날 불미스러운 전력에 따른 자격지심(自激之心)으로 수많은 공신과 문인들을 무참히 살해하기는 했으나 기본적으로 매우 서민적이었다. 보위에 오른 후에도 검박한 생활을 유지하며 음주가무를 멀리 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의 천하통일은 기본적으로 그가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나 민심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사실과 무관치 않았다. 원래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득민에 성공해 천하를 거머쥔 선구자는 한고조(漢高祖) 유방이었다. 당초 그는 정장(亭長: 지금의 역장에 해당)이라는 미관말직에 있던 중 진시황(秦始皇)의 급서로 천하가 일거에 혼란에 빠지자 이를 틈 타 기의(起義)한 뒤 마침내 항우(項羽)를 제압하고 천하를 거머쥐었다. 이는 그가 귀족 출신인 항우와 달리 민심을 얻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던 사실과 무관치 않았다. 그가 진제국의 도성인 함양(咸陽)을 점거했을 때 장로들을 불러 놓고 법삼장(法三章)을 약속한 것이 그 실례이다. 단 3개의 조항으로 이뤄진 ‘법삼장’은 당시 혹법(酷法) 하에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던 백성들에게는 일종의 해방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유방의 득국 비결은 사대부가 숭상하는 예의염치(禮義廉恥)를 깨끗이 내던지고 극히 서민적인 행보를 한 데 있었다. 이는 지난 대선에서 서민행보를 보인 노무현 후보가 귀족행보를 보인 이회창 후보를 제압하고 청와대에 입성한 것과 사뭇 닮아 있다. 최근 이 후보가 민심투어 과정에서 파격적인 서민행보를 보이고 나선 것은 지난번의 뼈아픈 실패를 감계(鑑戒)로 삼은 결과로 볼 수 있다. 원래 항우는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를 자랑하는 당대 최고의 영걸이었다. 그는 자만에 빠진 나머지 해하(垓下)의 싸움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그러나 그가 만일 오강(烏江)을 건너 권토중래를 노렸다면 아직 천하는 누구의 수중에 떨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한낱 “강동(江東) 자제들의 부형(父兄)을 볼 면목이 없다”는 이유로 하늘을 원망하며 자진하고 말았다. 그는 한낱 작은 자존심에 얽매여 천하대업의 길을 포기하고 만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출사표를 던진 이 후보의 행보는 자신의 삶이 항우에 비유되는 것에 대한 정면 거부로 볼 수 있다. ‘후흑’의 관점에서 볼 때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대세론은 그가 ‘후흑술’ 구사에 어느 정도 성공했음을 방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원래 BBK의 주가조작사건과 자녀들의 위장취업 사건 등은 전래의 ‘득민술’ 행보와는 동떨어진 것임에도 그가 여전히 국민들로부터 높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게 그 증거이다. 그러나 문제는 변화무쌍하기 그지없는 민심의 향배이다. 난세의 군웅들이 ‘득국’을 이루기까지 온갖 ‘후흑술’을 구사하면서 ‘득민’에 노심초사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 신동준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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