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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만화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는 것 만큼이나 한국 순정만화의 뿌리를 찾아내는 작업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주제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우리의 순정만화는 일본의 순정만화에 대해 얼마만큼이나 떳떳한지에 대한 문제가 불가피하게 따라 붙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연이었건 필연이었건 혹은 타의였건 자의였건 한국의 순정만화는 캔디 신드롬의 그림자 속에서 돋아난 싹이었으며 그 가리워진 응달 속에는 부끄러운 모방과 표절의 역사가 과거의 흔적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좀 더 밀도 있는 과거 추적이 필요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한국에 순정이라는 만화장르가 생성된 배경으로 1970년대 중반 <들장미 소녀 캔디>의 국내 상륙을 원인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엄격히 말해 이것은 잘못된 사실이다.
<들장미 소녀 캔디>가 해적판 만화로 국내에 출간되고 MBC를 통해 애니메이션이 방영되기 이전에 이미 한국에서는 순정만화로서의 골격을 갖춘 만화들이 존재해 있었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활약했던 만화가 권영섭은 한국에서 소녀대상 만화 장르를 처음으로 개척해낸 작가로서, 그가 1959년 발표했던 <봉선이> 시리즈와 <하얀 장미>는 국내 순정만화의 효시와도 같은 작품이다. 또한 비슷한 무렵 활동하기 시작한 <오빠만세 1964>의 최상록은 가족만화를 지향하면서 여성 취향의 작품들을 다수 발표했다.

물론 권영섭과 최상록의 당시 작품들을 일컬어 딱 잘라 순정만화라고 규정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 기틀을 마련한 것만은 사실이다. 바로 1970년대 초반까지 전성시대를 구가한 여성만화 3인방 엄희자, 민애니, 송순희가 등장할 수 있는 시장여건을 조성해 주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까지 인기 절정의 여성 작가로 활약했던 민애니의 <햐얀 돗배>와 엄희자의 대표작 <네자매>. 특히 엄희자가 출판사를 옮기면서 받은 계약금 1천만원은 당시 가수 이미자가 레코드 회사를 옮기며 받은 계약금과 같은 액수였을 만큼 그녀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1968년 선배 만화가 조원기와 결혼한 엄희자는 1983년 도미하여 애니메이터로 변신해 수많은 작품들에 참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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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들 3인방에 의해서 일본의 영향이 아닌, 독자적인 우리만의 소녀만화 시장이 형성되는가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더 이상 명맥을 이어주지 못했다. 그것은 당시 주종을 이루었던 국산 순정만화들의 전반적인 작품 성향이 10대 소녀 계층의 감수성에만 호소하는 지극히 단순한 내러티브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TV의 보급에 따른 외래문화의 수용, 경제 발전으로 인한 문화 소비 패턴의 변화 등이 1970년대 후반 10대 소녀들을 자극했고, 때문에 보다 새로운 것을 동경했던 소녀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던 것은 다름 아닌 안소니와 테리우스였던 것이다.
이렇듯 본래의 뿌리를 잃어버리고 바다를 건너 들어온 수입 모종에 의해서 부득이하게 그 영향권 안에 흡수되어 버린 한국의 순정만화는 심각한 정체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계속해서 순정만화를 보고 싶은 독자들의 수효는 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유리가면>, <유리의 성>, <롯테롯테>, <스완>, <안제리크> 등과 같은 일본 순정만화계의 고전명작들이 엉뚱한 한국식 이름의 가공의 작가명을 달고 위장 발간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흑나비>란 이름의 해적판으로 출간되었다가 이후 김이순이라는 가공의 작가명을 달고 다시 출간되었던 미우치 스즈에의 <유리가면>. 천의 얼굴을 가진 천재 소녀 유경(마야)과 라이벌 유미(아유미)가 홍천녀 역을 따내기 위해서 연기 대결을 펼치는 이 작품은 벌써 연재가 시작된지 30년이 넘는 고전이지만, 문제는 연재 도중 작가가 신흥 종교를 만들어 스스로 교주되어버리시는 바람에;; 작품의 크라이막스(대망의 '홍천녀' 결정 부분) 직전부터 진도가 멈추어 버려 30년 가까이 완결을 기다려온 독자들의 애절한 바램을 들어주지 않고 계시다는 것! 천신만고 끝에 지난 2005년 42권이 출간(6년 만에 나온 것.. ㅜ.ㅡ)되었으나 홍천녀는 여전히 오리무중인 채 또 다시 3년째 후속권이 나올 생각을 안하고 계심;;;
 현재까지도 많은 TV 드라마의 전형이 되고 있는 '순수하고 착한 여주인공의 모든 것을 빼앗아 신분상승을 꾀하는 악녀 이야기' 설정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와타나베 마사코의 <유리의 성>. 당시 새소년에 연재된 후 클로버문고로 발행되었는데, 처음엔 원작자가 정영숙으로 표기되었다가 중간에 황수진으로 교체되었다. 어린나이에 만화가가 바뀌었는데도 그림체가 똑같은 것을 보고 매우 신기했던 기억이 있다;;
 설상가상으로 <유리가면>과 <유리의 성>을 믹스시켜서 국내 작가가 만들어낸 놀라운 작품 <파도여 안녕>. 그러나 이 과정에서 오늘날 한국 드라마의 핵심 키워드인 '출생의 비밀' 플롯이 완성되는 예상치 못한 수확도 발생한다. 본래는 어깨동무에 연재되었으나 단행본은 클로버문고로 출간되었다.
 발표 당시 발레 붐을 몰고오며 순정만화의 장르 다양화에 크게 기여했던 아리요시 쿄코의 <스완>. 국내에는 <백조>라는 이름으로 최초 출간된 이래 <흑조>, <마지막 백조>, <환상의 프리마돈나>로 이름을 바꾸어가며 무려 4번이나 재출간되었을 정도로 오랜 인기를 누린 작품이며 때문에 고전 순정만화로는 이례적으로 지난 2004년 학산문화사에서 정발(전21권)되어 이 작품을 소장하고 싶은 팬들의 원을 풀어주었다.. ㅜ.ㅡ
 1970년대의 국내 상황에서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초귀족 스포츠 '승마'를 소재로 하여 더 많은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승마에 대한 환상은 홋날 '작은 숙녀 링'에서 또 한번 국내 소녀 팬들을 매료.. ^^:) 우에하라 기미코의 <롯테롯테>. 엄마의 죽음을 둘러싼 오해로 벌어지는 언니 롯테와 동생 카라의 아슬아슬한 이야기 구조가 손을 땔 수 없게 했던 작품!
 <롯테롯테>로 국내에서 떠 버린 우에하라 기미코를 당시 표절만화 공장 돌리고 계셨던 김영숙 작가깨서(그래도 훗날 순정만화 전문지 '하이센스'까지 창간하시고 나름 한국만화계에 많은 흔적 남기시죠;;) 독점 카피 계약 맺으시고 출간해 대박냈던 작품. <베르사이유의 장미> 후반부에도 등장하는 프랑스 혁명의 실제인물 생쥬스트가 나오는 역사물에다가 <유리가면>처럼 연극을 소재로한 두 가지 흥행요소를 고루 갖춘 작품이라 그만큼 더 화제가 되었다.
 <베르사이유의 장미>와는 또 다른 각도에서 프랑스의 역사 소설을 각색해 화제를 모았던 키하라 토시에의 <안제리크>. 다만 이 작품의 경우는 원전 소설이 있기 때문에 소설가를 원작자로 표기해 국내에 출간되었는데, 오히려 일본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큰 인기를 누린 작품중 하나로 지금도 헌책방에 이 해적판을 찾는다는 문의가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나중에 정발되면서 본래 원작자인 이케다 리요코 이름으로 출간되었던 <베르사이유의 장미> 역시 최초 해적판 발간시에는 이 만화의 원전 소설을 쓴 슈테판 츠바이크가 원작자로 표기되었었다. <들장미 소녀 캔디>와 함께 순정만화 붐을 일으킨 실질적인 작품으로 원작자의 또 다른 대표작인 <올훼스의 창> 역시 순정만화 팬들에겐 불멸의 명작 리스트에 올라있다.
 1976년 소녀만화 잡지 '꽃과 꿈'에 연재된 이래 TV 드라마로 영화로 수차례 리메이크되며 최근까지도 식지 않는 인기를 누리고 있는 와다 신지의 <스케반 형사>까지 국내에 해적판이 나온 것은 아는 분이 그리 많지 않은데, 개인적으로 국내 해적판 네이밍 센스의 최첨단을 달린 작품이라 생각함;; 저 시절에 이미 '로리'라는 이름을 붙혀주시다니... 헐;;
어떻게보면 양심 없는 출판사들 덕에 당시 세대는 순정만화사에 기념적인 고전 명작들을 바로바로 구독할 수 있는 혜택(?)을 누린 셈이지만;; 그 과정에서 무수한 가공의 작가와 표절 작가들이 양산되었고 더욱더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표절 만화를 교과서 삼아서 지망생들이 공부했다는 점이다(일부 몰지각한 출판사들은 기성 작가에게까지 표절 만화를 그리도록 강요한 경우도 적지않게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혼란기 속에서 한국의 순정만화는 아이러니하게도 몇몇의 남성 작가들에 의해서 희망의 불씨를 밝히게 된다. 1980년대 들어와 한국의 만화시장은 새소년, 어깨동무, 소년중앙이라는 3대 소년 교양지가 주도하고 있었고 김동화, 차성진 등의 작가들이 이 소년 교양지의 틈바구니 안에서 순정이라는 장르를 시도하게 된다.
③편에서 계속 ···
엮인글
① 추억의 순정만화: 순정만화의 양대산맥 ② 추억의 순정만화: 해적판으로 읽었던 고전 명작들 ③ 추억의 순정만화: 한국의 빛나는 창작 순정만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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